<백호> 나는 낯설고 이상한 도시를 헤매고 있다. 거리에는 인적 이 없다. 가끔씩 신문지가 바람에 날려 굴러와서 다리를 휘 감고, 아무도 타지 않은 버스가 덜컹거리며 지나간다. 내 손에는 약도가 그려진 종이가 있다. 어디로 가는 약도 인지는 모른다. 나는 다만 끝없이 이어진 텅 빈 거리를 따 라 걸어가고 있다. 눈보라치는 겨울산 골짜기에 산장이 서 있었다. 그것이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내 기억의 가장 앞쪽 끝에서 부터 한 순간씩 그 존재를 느껴 오긴 했었으나 그 소리를 듣기는 처음이었다. 무엇인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나는 그 무엇인가를 향해 끊임없이 달려왔고 이제 그것이 조금씩 모 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제 1장 <1985년 3월> "죽었어 경수가... 죽 었 어... 이럴 수는 없어." 동훈이었다. 혼이 빠져나간 듯한 목소리였다. "무슨 소리야? 경수가..." 한동안 아무 말도 없었다. 흐느끼는 격한 호흡만이 건너왔다. "...주, 죽었다구... 현우 친위대 놈들한테 맞아서 죽었어..." 동훈의 음성이 들렸다 안 들렸다 했다. 수화기를 잡고 있 는 손이, 온 몸이 걷잡을 수 없이 떨려왔다. 언제 잠이 들었는지 모른다. 수요일은 항상 그렇듯이 땀 에 흠뻑 젖어서 눈을 떴다. 시야가 흐릿했다. 학교는 이미 떠들썩했다. 여기저기 대자보가 찢어져 나풀 거렸다. 학생회관 앞은 인산인해였다. 누군가 계단 위에서 절규하고 있었다. 복도는 웅성거리는 학생들로 발디딜 틈이 없었다. 두레 서클룸은 열려진 채로 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 었다. 남종석이 안쪽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상규 형은 민철이 때문에 뒤에 남았어. 나는 운전하고 동훈이는 화물칸에 경수랑 같이 있었지. 가는 도중에 정신 이 들었는지 경수가 비명을 지르더라구.... 동훈이가 조금만 더 견디라고 울면서 소리치고... 병원까지 이십 분도 안 걸 렸는데 도착해 보니까 경수가" 남종석이 채 말을 잇지 못하며 고개를 숙였다. 사람들 사 이에 침중하고 무거운 탄식이 흘렀다. "여러 말 할 것 없어. 한 줌도 안 되는 개새끼들, 당장 가 서 때려 죽이자구!" 앞줄에 서 있던 누군가가 찢어지게 악을 썼다. 우 하는 호응이 뒤를 이었다. 그 이후의 기억은 토막토막 끊겨 있다. 등 뒤에서 엘리베이터가 닫혔다. 기섭이 문을 열었다. 그가 찌르는 주사기가 세 개로 보였다. 근육이 풀려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천장이 제각각으로 길게 짧게 일그러졌다.... 기섭은 침대머리에 등을 기대고 앉아 담배를 피우면서 내 가 옷입는 것을 지켜 보았다. 벽에 걸린 전자시계의 숫자는 PM 11:42였다. 그는 침대 옆 탁자의 서랍을 열고 꼼꼼히 접혀진 작은 종이봉투를 꺼내어 건네 주었다. 아버지는 없었다. 여자가 말했다. "왔니?" 방문을 닫고 들어서자마자 바닥에 처박히듯 쓰러졌다. 손 가락 하나 까딱할 수가 없었다. 시간은 녹아서 나른한 몽롱 함이 되어 내 머리카락 끝에서부터 발톱 끝까지를 천천히 애무하며 흘러갔다. 나는 무거운 눈을 느리게 깜박거리며 조금씩 깨어났다. 창문 너머로 달의 자취가 희미하게 남아있는 하늘이 보였 다. 창문을 열자 싸늘한 새벽 공기가 밀려 들어왔다. 잘 다 듬어진 정원 너머로 음습한 나무 그늘에 가려지다시피한 별 채가 보였다. 잘 잤어, 형? 어제는 수요일이었다. 약이 떨어지는 날. 아침부터 잠깐씩 의식이 끊기면서 징후가 오다가 점차로 무의식 상태가 길어 져 마침내는 기섭에게 가게 되는 날.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그제인 화요일, 자정이 가까운 무 렵에 동훈의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 어제.... 어떻게 학교에서 나와 기섭의 아파트로 갔는지, 또 어떻게 집으로 돌아왔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 다. 부르르 몸서리치며 창틀에 머리를 기댔다. 증세가 더욱 악화되어 있었다. ...약을 끊어야 해. 다시는 기섭에게 가선 안돼. 작년 시월, 거의 끌려나가다시피 한 고팅에서 나는 떡이 되게 마셨다. 화장실에서 불편한 속을 게워내고 얼굴을 씻 다가, 거울 속에서 나를 향해 웃고 있는, 보조개 패인 턱선 이 인상적인 사내와 시선이 마주쳤다. "괴로운 일이 있나? 내가 잊게 해주지." 그가 온화하게 말했다. 그리고 나는 그의 아파트에서 그가 준 음료수를 마시고 전혀 다른 새로운 세상을 알게 되었다. 황홀한 비행(飛行)이 계속되었다. 텅빈 버스가 다니는 인적없는 바람의 거리를 그날 처음 보았다. 몽롱한 의식으로도 그가 날 눕히고 옷을 벗기는 것을 알 았지만 반항하지 않았다. 나는 계속 웃고 있었다. 이봐, 유 현우... 절대군주 각하. 내가 지금 뭘하고 있는 줄 알아? 아 하하... 이거 참 재밌는데. 사내는 자기를 기섭이라고 소개했다. 그 이후로 매주 수 요일마다 기섭과 나는 서로에게 필요한 것을 교환해왔다. 아버지는 내가 식탁 앞에 앉자 와작 신문을 구겼다. 침묵 은 길지 않았다. "너 요새 무슨 염병을 앓고 다니는 거냐?" 낮게 으르렁거리는 목소리는 그가 얼마나 화가 나 있는지 말해주고 있었다. "대답 안해?" 구겨진 신문이 내 얼굴을 때리고 떨어졌다. 아버지는 형 이 별채에 있게 되기 전의 서 대령처럼 보였다. 당장이라도 혁대를 풀어 쥘 것 같았다. 이젠 그만 질릴 때도 되지 않았어요? 형을 저 지경으로 만들고도 아직 부족하세요? "잘못했습니다." 아버지는 입을 한일자로 다물고 나를 뚫어지게 노려보았 다. 등을 타고 소름이 일었다. 여자가 찌개 그릇을 놓으며 걱정스러운 눈빛과 상냥한 미 소가 적절히 섞인 표정을 지었다. 아버지 보는 데서는 항상 그렇듯이 "왔니"의 얼굴은 흔적도 없었다. "어제 현우가 전화했더구나. 오면 꼭 연락하라더라. 어젯 밤엔 하도 정신이 없어 보여서 얘기 안했다." 어제 분명히 아버지에게 했을 얘기를 또 그 앞에서 울궈 먹고 있었다. 여자의 취미였다. 언젠가 한 번은 나를 두들겨 패는 아버지의 어깨 너머로 손으로 웃음을 가리고 서 있는 여자를 본 적이 있었다. "어떤 질 나쁜 놈들하고 어울리기에 야밤중에 갈짓자로 기어와? 도대체 한 두번도 아니고 뭐에 그렇게 넋이 빠졌 어! 알 굵어졌다고 대접해줬더니 고작 이따위로 밖에 못 해!" 아버지가 화난 진짜 이유는 현우가 전화했을 때 내가 없 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나와 현우의 친분을 당신이 2성으 로 전역하느냐 3성으로 전역하느냐, 전역 후엔 국영 기업체 의 사장이 되느냐 금배지를 다느냐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 으로 알고 있었다. 더구나 아버지는 형의 일 때문에 언제나 위기감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참을 수 없이 역겨웠다. "잘못했습니다." 집에서는 언제나 입에 달고 있어야 하는 이 말을 가장 공 손해 보이는 태도로 대여섯 번 더 중얼거리고 나서야 수저 를 들 수 있었다. "오늘은 현우한테 가라." "......." "왜 대답이 없어?" "...예" "확실히 말해!" "가겠습니다." 이른 아침의 학교에는 어제 집회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몇 분전에 써붙여 아직 찢겨 나가지 않은 대자보를 몇 명이 둘러서서 읽고 있었다. <校庭 안의 살인폭력과 新파시스트의 창궐을 규탄하며> 지난 3월 19일 어용총장과 재단의 사퇴를 요구하며 총장 실을 점거하고 농성 중이던 남경수(미생물학과 2년)학우가 재단의 사주를 받은 체대생 등에게 구타당해 숨졌다. 같이 농성 중이던 학우들의 증언에 의하면 남경수 학우는 와병 중인 아버지가 위급하다는 소식을 듣고 황민철(사학과 1년) 학우와 함께 총장실을 나갔다 한다. 이로부터 이십여 분 후, 인문관 뒤 등나무 휴게실 근처에서 남경수, 황민철 학우가 흉기를 휘두르는 7~8명의 괴한들에게 폭행당하고 있는 것을 발견한 고준성(노어노문학과 1년)학우에 의해서 마침 인문관 내 사학과 과룸에 있던 민주 학우들에게 알려 졌다. 괴한들은 달려온 민주학우들을 보고 도주했다. 강상규(의대 본과 4년)학우의 응급처치와 트럭을 동원한 신속한 이송에도 불구하고 남경수 학우는 병원 도착시 이미 숨져 있었다. 직접적인 사인은 부러진 갈비뼈에 의한 폐파 열과 경동맥 절단으로 인한 과다 출혈로 판명되었다. 또한 황민철 학우는 전치 12주의 중상으로 현재 Y병원에 입원 중이다. 민주 학우의 증언에 의해 괴한들은 한병규(체육학과 2년) 변종운(좌와 동) 남익훈(체육교육학과 1년) 윤세용(좌와 동) 김태석(경영학과 2년) 등인 것으로 드러났다. 이들은 작년부 터 수차례에 걸쳐 시위 중의 학우들을 상대로 폭력을 휘둘 러 많은 비난을 받아온 인물들이다. 우리는 짐승의 논리 속을 살고 있는가? 인간의 사회에서 어떻게, 단지 정의롭게 살고자 했을 뿐인 한 청년이 신성한 상아탑 안에서 그것도 학우들에 의해 살해당할 수 있단 말 인가? 이 천인공노할 만행 앞에서도 배후 조종자 가운데 고 위층 자제가 섞여 있다는 이유로 부패한 권력의 주구 경찰 은 형식적인 조사조차 소홀히 하고 있는 실정이다. 총학생 회는 이 사태에 대해 총장의 솔직한 해명과 함께 납득할 수 있는 조치가 신속히 취해질 것을 요구하는 바이다. 이 정당 한 요구가 관철되기 전에는 故 남경수 학우 역시 평안히 잠 들 수 없을 것이다. 일만 오천 민족학우여! 이 무자비한 시대의 비극, 살인 군부 정권의 비극을 종결시킬 수 있는 힘은 오직 우리 가슴 속 끓어오르는 의분과 불의에 대한 증오의 뜨거운 하나됨, 그리고 그 분출 뿐임을 명백하게 알아야 한다! 대자보를 읽던 사람들이 한마디씩 했다. "오늘에야 그 자식들 소환한다며? 일이 너무 시끄러워지니까 마지 못해서." "그 정도 하는 것도 큰 용기지. 총장이 유현우 아버지 찾 아가서 심려 끼쳐드려 죄송하다고 백배 사죄했다는데. 을지 문덕 몇 트럭 풀어서 집 주위 경호 철저히 하라고 치안본부 장이 직접 지시했다더라." "종석 형 말이 사실이야?" "그거? 두레 애들이 유현우 잡을 자살조 만들 거라고..." 내 옆에 서 있던 여학생이 말하는 남학생의 옆구리를 찌 르며 눈짓으로 나를 가리켰다. 일시에 시선들이 나에게 쏠 렸다. 누군가 내 발밑에 침을 뱉었다. "어디서 개 냄새가 난다 했더니... 뭘 염탐하러 온 거지?" "어딜 가? 주제에 듣기 싫은 말도 있는 모양인데" "형 얼굴에 똥칠 그만하고 차라리 죽어라, 자식아!" 돌아서는 등 뒤로 갖은 욕설과 빈정거림들이 따라왔다. 돌멩이 하나가 어깨를 때렸다.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 증오 에 찬 눈들을 마주볼 용기가 없었다. 대학 내에서 열사 서인호의 동생은 어딜 가나 주목을 받 았다. 입학식 때부터 여러 서클에서 끊임없이 찾아왔다. 왜 형을 열사 만드는 일에만 그렇게들 집착하지? 형은 죽지 않 았어. 살아있는 형한테도 좀 관심을 가져 보라구. 그들을 피 해 다니면서 속으로 뇌까렸다. 그들이 실망과 경멸에 찬 얼 굴로 나에게서 완전히 떨어져 나간 것은 일년 조금 못 걸리 는 기간이 흐른 뒤였다. 모든 관심과 질타에서 벗어난 일학년 겨울방학에―약을 시작한 지 2개월이 넘어가던 때였다― 학생회관에서 우연히 동훈과 마주쳤다. 오른쪽 다리를 심하게 절고 있었다. "너 이 학굔 거 알고 있었어. 소식 듣자마자 만나려고 했 는데 어째 이제서야 연이 닿았군." 당혹감으로 주춤거리고 있던 내게 웃으며 손을 내미는 그 의 얼굴엔 반가움만이 있었다. 검정고시를 치고 지금은 H대 1학년이라 했다. 옆에 있던 H대 사람들과도 인사를 나눴다. 두레 서클룸에서 나오던 의대 본과 3학년의 강상규와 우리 과 복학생인 남종석이 동 훈을 발견하고 웃으면서 다가왔다. "자식, 왔으면..." 남종석이 동훈에게 말을 걸다가 나를 보더니 이맛살을 접 었다. 서클룸이 가득한 학생회관 2층에서 나를 좋은 표정으 로 지나치는 사람은 드물었다. "아는 사이냐?" 아주 떫은 감을 씹은 얼굴을 하고 남종석이 묻자 동훈이 내 어깨를 감싸며 대답했다. "고등학교 동창입니다." "네 동창한테 무슨 일로 왔는지 마저 가르쳐 주지 그래. 우리하고 너희 두레가 연합했다고 해봐. 좋은 구경 할거다. 꼬뮤니즘 '꼬'자만 나와도 벌써 십리 밖으로 사라지고 없어. 언제 한번은 닭이 꼬꼬댁하니까 빳빳하게 굳어서 기절했더 라구. 윗물이 아무리 맑아도 하천이 시궁창 아니란 법은 없 는 거니까." 강상규가 내 쪽으로는 얼굴도 돌리지 않고 빈정거렸다. 형의 분신 후 일 년간 휴학했었다는 형의 절친했던 친구로 나를 가장 끈질기게 다그치던 선배들 중 하나였다. 그 옆의 남종석도 거의 버금갈 만큼 집념을 보였다. 네 형이 분신했 을 때 난 그 현장에 있었다. 그 후로 그분은 내 삶의 지표 가 됐어. 너나 너희 집구석 같은 똥무더기를 견딘 그분이 더욱 존경스럽다. 남종석이 나를 포기하면서 마지막으로 한 말이다. 사람들이 나에게 그 지경으로까지 등을 돌리게 된 건 현 우의 영향이 컸다. 그는 대학에 들어와 다시 클럽을 만들었 다. 말하자면 나찌스Ⅱ였다. 체대를 중심으로 극우 세력을 결성해서 교내 경찰 노릇을 톡톡히 해냈다. 그가 왜 육사를 지원하지 않았는지는 오직 신만이 알 것이다. 나는 다시 그 와 묶여 반수의 선망과 반수의 살의 속에 같이 놓였다. "동훈아, 무투사 분철했어? 안 했으면 놔두고 가. 기명 형 들렸대." 누군가가 삼층 학보사에서 내려오다가 동훈을 보고 소리 쳤다. 황달기가 있어 보이는 안색에 둥근 뿔테 안경을 낀, 오다가다 몇 번 본 기억이 있는 얼굴이었다. 동훈이 그를 소개했다. "이쪽은 남경수야. 태어날 때부터 같은 동네에서 살았어. 부모님 사고당하고 몇 년간은 얘네 집에 있기도 했고.... 나 하고는 친 혈육보다 더 가까운 사이지." 남경수 역시 두레의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를 팔뚝 에 떨어진 송충이처럼 쳐다봤다. 동훈은 두레 일로 자주 찾아왔다. 토플 강의 때문에 학교 에 나오던 나하고도 여러 번 마주쳤다. 방학이 거의 끝나갈 무렵의 어느 지독히도 춥던 날, 나와 동훈은 남종석의 1톤 짜리 타이탄 트럭 안에 앉아 있었다. 본과 4학년으로 올라 가는 강상규가 두레 짱(長)에서 물러나고 남종석이 새로운 짱으로 선출되어 그 턱을 쓰러 아이들을 모아놓은 민속주점 으로 가는 길이었다. 동훈의 청으로 방향이 같은 나를 태워 준 것이다. "현우 명성은 여전하던데? 민족부흥을 위한 척결 리스트 제 1호라더라." 동훈이 추위로 곱아진 손을 비비며 말했다. 웃음 섞인 목 소리였다. 나는 혼란 속에서 그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그가 현우의 얘기를 웃으며 할 수 있을까? 아무런 감정도 남아있지 않다 면 그건 거짓말일 것이다. "유현우 새끼, 그 썩은 대가리를 언제 한 번 거창하게 보 수해 줄 날이 있을 거야. 그 새끼 똥구멍 빨겠다고 덤비는 놈들도 한 두름에 싸잡아서." 남종석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 나를 자기 보물에 태운 것 이 못내 열통 터지는 모양이었다. "재단에서는 뭐랍니까, 여전히 오리발이죠?" 동훈이 슬쩍 화제를 돌렸다. "언제나 하던 식이지, 빌어먹을 돼지들! 어쨌든 그쪽도 더 는 못 버틴다. 개강이 일주일도 안 남았잖냐. 이번엔 정말 해볼만 하겠는데 말이야. ...물론, 또 때맞춰 우리 학교 똥덩 어리님들도 죽사발 뒤집으러 행차하셔야겠지." 끝말을 하면서 나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았다. 그 날 이후로 동훈과 연락이 된 건 개강 후 3주일이 지나 고 총장실 점거 닷새 만이던 그제 화요일 밤, 남경수의 죽 음을 알리던 전화를 통해서였다. 벽 한면을 덮은 대형 스크린 위로 붉은 조명의 포르노 필 름이 돌아가고 있었다. 소파에 앉아 있던 현우가 힐끗 나를 쳐다보았다. "드디어 납시었군. 잡아먹지 않을 테니까 와서 앉아." 그는 꽁초가 수북히 쌓여있는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끄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내가 옆에 앉은 후에도 한참을 험악하 게 스크린만 응시하고 있다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대장이 몇 년 나갔다 오란다. 니기미... 그깟 벌레 같은 새끼들한테 쫓겨나. 그냥은 안 가겠어. 임신했다고 들러붙던 년들보다 더 열성인데 이쪽도 성의껏 보답을 해줘야겠잖 아?" 남녀 성기의 접합 부위가 클로즈업되어 화면 가득 펼쳐졌 다. 애액으로 번질거리는 음경이 여자 속으로 사라졌다가 다시 반쯤 모습을 드러냈다. 온 방안에 습기차고 끈적끈적 한 마찰음이 숨가쁘게 흘렀다. 현우의 손이 내 다리 사이로 들어왔다. "지금 이 사건 재주 노는 놈이 누구야?" 그가 불쑥 물었다. 오한이 등골을 타고 흘렀다. 삼년 전 그 창고에서 펼쳐졌던 지옥도가 벼락처럼 머리 속을 스쳤 다. 현우가 내 턱을 핥으며 속삭였다. "누구야? 얘기해 봐." "...내가 어떻게 알아" "모른다구?" "...응..." 현우가 무서운 얼굴로 웃었다. 갑자기 나를 밀어 넘어뜨 리고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이러지 마...으윽...큭" "뭘 몰라 새꺄. 또 최동훈일 싸고 돌아? 왜, 그 새끼 얼굴 보니까 옛 정이 새로워? 확실히 알아둬. 그때처럼 딴 짓하 면 너 이번엔 정말 죽여 버리겠어!" 현우의 눈이 차마 마주보기 힘들 만큼 살기를 띠고 있었 다. 걷잡을 수 없게 몸이 떨려왔다. "재주 부리는 놈이 누구야!" "...그...그만...해...큭...크..." 목을 누르는 손에 더욱 힘이 가해졌다. "누구냐니까!" "...동...동훈이..." "안 들려, 더 크게 말해!" "최, 최동훈이라구! 최동훈이야!" 그의 손이 떨어져 나갔다. 그는 경멸하듯 나를 내려다 보 았다. 헐떡거리면서 나는 모멸감으로 일그러진 얼굴을 감쌌 다. 다시 한 번 동훈을 배신했다. 아니, 앞으로 백 번도 천 번도 넘게 그를 팔아넘길 것이다. 형 얼굴에 똥칠 그만하고 차라리 죽어라 자식아. 현우는 내 다리에 걸려있던 팬티를 마저 벗겨 던졌다. "이달 말에 프랑스로 뜬다." "......." "너도 가는 거야." "...난..." "안 간다는 얘기면 닥쳐! 기분 더 잡치게 하지 마. 돌기 일보 직전이니까" "......." "너 지금 무슨 생각해... 그 새끼 생각하지?" "아, 아니야." "그럼 왜 이렇게 굳었어. 씨팔, 아프잖아!" 그가 삽입하기 쉽도록 엉덩이를 들면서 나는 멍하니 붉은 화면에 시선을 던져두고 있었다. 으윽...! 십 년 가까이 당해 온 일이지만 결코 익숙해지지 않는다. 항상 끔찍할 뿐이다. 프랑스... 안돼. 그곳까지 날 끌고 가겠다고? 소름이 끼쳤다. 눈을 감았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편이 나았다. 어차피 현우는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할 것이다. 그러나... 단 한 번만이라도 현우에게 싫다고 말할 수 있 다면, 그 앞에서 당당히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릴 수 있다면 죽어도 좋다고 절실하게 느낀다. 난 사람이니까... 나도 사 람이니까 말이다. 정원 한구석에 어둡게 웅크린 별채는 언제나처럼 등 하나 도 켜 있지 않았다. 저렇게까지 형의 존재를 숨겨서 아버지에게 남는게 뭘까? 권력? 명예? 나는 코를 대고 약을 빨아 들였다. 벽에 등을 기대고 느슨하게 앉았다. 동훈은 디데이 하루 전날 말했다. "여섯 시까지 와. 기다 린다." 형도 나를 기다리고 있어? 오년은 너무 길었어... 텅 빈 버스가 지나가면서 먼지 섞인 바람이 불어왔다. 손 에 든 약도를 보니 붉은 선이 서쪽으로 구부러져 있다. 그 곳에는 골목이 있었다. 전쟁이라도 휩쓸고 간 것 같은 폐허 속에 시체가 즐비하게 널렸다. 짐승에게 뜯어먹힌 듯 끔찍한 몰골들이었다. 어디선가 소근대는 목소리가 오고갔 다. (미친 년이냐?) (저건 아냐. 곧 올걸) 기대에 찬 속삭임 들. 어쩐지 허기진 듯한.... 골목은 들어갈수록 넓어져 커 다란 복숭아 나무가 서 있는 곳은 마치 광장 같았다. 복숭 아 나무 아래서는 불도저가 돌아가고 있었다. 내가 다가가 자 불도저 위에 누워 있던 시체가 말했다. "서인호의 동생이로군." 시체는 확인이라도 하듯 나를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가져 가." "예?" "니 형이 맡겨 놓은 것 말이야." 시체는 운전석 밑을 가리켰다. 활과 화살통이 있었다. "형을 아세요?" "아느냐고?" 시체들이 모두 입을 벌려 웃었다. 그 소리에 벽이 쩍쩍 갈라져 나갔다. 나는 불도저 위의 시체를 흔들었다. "안다면 말씀해 주세요. 형은 왜 저렇게 됐죠?" "기억이 안 난다는 거냐? 농담하는 거야?" "말씀해 주시면 제 옷을 모두 벗어 드릴께요." 시체는 웃음을 멈추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부족은 저주를 받아서 아래쪽 앞니 사이에 쇠로 만든 화살이 박혀 있었어. 아무 것도 먹거나 마실 수 없었지. 모 두들 턱이 빠지고 화살촉에 목구멍이 찔려 목소리를 잃었 어. 그러던 어느날 신탁이 내렸지. 누군가 다른 사람의 화살 반쪽을 끊어주면 그 화살은 끊어 준 사람한테 가서 박히고 그 다른 사람은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간다는 거였어. 네 형은 부족 전체의 화살을 끊어 가졌어. 그..." ...저주에서 풀려난 사람들은 환호성을 지르고 울며 웃 으며 멀어져갔다. 광장에는 우리 둘만 남아 있었다. 형은 전 신이 녹슨 화살들에 꿰뚫린 채로 나의 화살을 향해 손을 뻗 었다. 형의 몸에서 남은 곳은 심장 밖에 없었다. 형은 내 화 살의 반쪽을 자신의 심장에 가져다 댔다.... "이제 기억나? 너희가 그를 불태웠어. 네 형은 영원히 그 모습으로 있어야 해." 뺨을 타고 뜨거운 쇳물 같은 고통이 흘러 내렸다. 그렇다 면...그렇다면 형이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아 무리 흔들어 봐도 고개만 저을 뿐 시체는 더이상 말이 없었 다.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시체에게 옷을 모두 벗어주고 골 목을 나왔다. 저쪽에서 한 여자가 걸어 왔다. 귀 뒤에 붉은 꽃을 꽂고 가끔씩 춤을 추기도 했다. 여자는 나에게 초점이 맞지 않는 시선을 던져 왔다. "복숭아 나무가 어디 있니?" 여자는 상냥하게 노래하듯 물었다. 아까 골목에서 들었던 허기진 속삭임들을 떠올렸다. 가지 말라고 말하려는 순간 여자는 내 옆을 스쳐갔다. 돌아보니 뭔가 거무스레하고 장 대한 것이 여자의 팔을 나꿔채서는 빠르게 사라져가고 있었 다. 어딘지 모르게 낯이 익는 그것은 마치... 나는 활과 화 살통을 늘어뜨린 채 그 자리에 못박힌 듯 서 있었다... 기섭 의 아파트 엘리베이터 같았다. 제 2장 <1982년 11월> "오늘 바쁘냐?" 최동훈이 내 앞 책상에 엉덩이를 걸치며 물어왔다. 가방을 챙기는 척 하면서 주위를 살폈다. 얼마 남아있지 않은 아이들 중에 다행히 한승수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 다. "별로." "그럼 데이트 좀 할까?" 방과 후에 남아 있으라던 현우의 말이 떠올랐다. "싫어?" "......." "아니면 네거리 수족관 앞으로 여섯 시까지 와. 기다린 다." 동훈이 나가고 난 후에도 한참동안 자리에 앉아 있었다. 동훈은 형을 닮았다. 동훈이 전학온 날 교단에 올라서는 그를 보고 한동안 내 눈을 의심했을 정도였다. 외모 뿐 아 니라 말투와 행동까지도 똑같았다. ...형.... 엄마가 죽은 후에 형과 내가 들어간 아버지의 집은 우리 를 맞던 여자의 냉랭한 얼굴 같은 곳이었다. 아버지는 내가 늦게 일어난다고 담뱃불로 머리를 지지는 사람이었다. 성적 이 떨어지거나 집에 늦게 들어간 날은 철바클이 달린 혁대 로 얻어맞았다. 형은 나를 때리는 아버지에게 대들다가 며 칠씩 운신도 못할 정도로 두들겨 맞곤 했다. ...형.... 그가 대학에 입학했던 80년의 늦은 봄, 그는 갑자기 실종 되었다가 그 해 유월 부슬비가 내리던 오후에 아버지의 지 프에 실려 나타났다. 강제로 휴학을 시킨 아버지의 감시 하 에서 그는 음울한 눈빛으로 하루종일 꼼짝 않고 어두운 방 안에 누워 있었다. 팔월 말에 조금씩 소홀해져 가던 감시망 을 뚫고 다시 가출할 때까지 한 번도 입을 열지 않았다. 형이 사라지고 무거운 공기가 질식시킬 듯이 내리누르던 그해 겨울, 집에 돌아오니 그가 와 있었다. 현관을 들어서는 데 아버지의 고함소리가 버럭 터져 나왔다. "하고 많은 염병 중에 왜 하필이면 빨갱이 지랄이냐? 김 일성이가 니 목구멍에 밥을 넣어줘, 떡을 넣어줘? 나하고 무슨 원수를 져서 못잡아먹어 한이냐, 엉? 어디 길바닥에서 차에 쳐 뒈지기라도 해!" 아버지는 손에 잡히는 대로 박살을 내고 있는 모양이었 다. 한참동안 물건 깨지는 소리와 아버지의 고함이 계속되 었다. 조금 잠잠해졌다 싶었을 때 억눌린 듯한 형의 목소리 가 들려왔다. "그 엄청난 죄를 짓고 이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하셨어요? 인간의 어떠한 힘도 아버지를 숨겨주지는 못 할 겁니다. ...이제 제가 하려는 일로 해서... 아버지의 죄가 조금이나마 가벼워질 수 있게 되기를 빌겠습니다." "뭐...뭐라고, 이 새끼야?" 엄청난 소란이 일어났다. 아버지는 마치 발작하고 있는 것 같았다. 형이 내려왔다. 나는 형을 따라 나갔다. 아버지 가 우당탕 계단을 뛰어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담 을 넘어 어두운 골목을 달렸다. 형은 말없이 놀이터 그네에 앉아 있었다. 무언가를 골똘 히 생각하고 있는 얼굴이었다. 그는 얼마후에 일어섰다. "지호야." 나는 형을 쳐다보았다. 형은 나를 힘껏 끌어 안았다. 떨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나를 밀치고 어둠 속으로 달려갔다. 다음날 형은 몸에 불을 붙인 채 학교 옥상에서 뛰어내렸 다. 아버지와 여자의 이야기를 엿듣고 찾아간 병원은 최루탄 이 자욱한 전쟁터였다. 나는 병원문 안으로도 못 들어가 보 고 아버지가 풀어놓은 감시망에 걸렸다. 집으로 끌려온 나 는 생전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대들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생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아버지는 나를 지하실로 끌고가 서 발가벗겨놓고 기절할 때까지 혁대로 후려쳤다. 몇 번인 지도 모르게 의식을 잃으면서 닷새 동안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하고 지하실에 갇혀 있었다. 그곳은 너무나도 추웠다. 갈 증과 허기는 육신의 고통 이상으로 나를 미쳐가게 만들었 다. 분노는 증오로, 증오는 공포로 바뀌어갔다. 그리고 공포 는 최종적으로 모든 것을 지배했다. 마침내 그 지옥에서 끄 집어 내졌을 때 나는 아버지의 권위에 대해 어떠한 의심도 품고 있지 않았다. 며칠이 지나고 정신을 차린 나는 괴괴한 집안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아버지는 많이 지쳐 보였다. 형에 관한 것 은 흔적도 없이 치워져 있었다. 사진 한 장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어느날인가 창가에 서서 무심코 별채 쪽을 보고 있는데 별채의 창문에 사람 그림자 같은 것이 어른거렸다. 별채는 일년 내내 잠겨 있는 곳이었다. 형과 내가 이 집에 들어와 서부터 지금까지 그곳에 사람 그림자가 어린 일은 없었다. 형이다. 직감적으로 생각했다. 저기에 데려다 놨구나. 그 후로 나 는 모든 신경을 별채에 집중시켰다. 아마도 그곳에는 별도 의 간호사와 가정부가 딸려있는 모양이었다. 사람의 그림자 가 둘 혹은 셋씩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형은 삼년 동안 단 한 번도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정각인데? 최소한 두 시간은 기다릴 각오였는데 싱겁잖 아." 동훈이 활짝 웃으며 다가왔다. 부쩍 짧아진 해는 벌써 건 물 사이로 사라지고 소슬한 바람이 코트깃을 헤집고 지나갔 다. 동훈이 안내한 곳은 <화랑 권투 체육관>에 딸려있는 살림집―체육부장 한기욱의 집이었다. 순간적으로 몸이 움 찔했다. 어쩔 수 없이 규율부장 사건이 떠올랐다. 거실에는 한기욱을 비롯하여 이대홍, 조현식, 10반의 강명 섭, 송남규, 4반의 최정안과 그 외 다른 반으로 보이는 낯설 은 아이들 해서 대략 스무 명 가량이 먼저 와 있었다. 내가 들어가자 모두들 입을 다물었다. 찌르는 듯한 시선들이 나 에게로 향했다. 한기욱이 말했다. "여어, 이건 또 실장님 아니시라고. 누처에 어인 행차십니까?" 그는 특유의 빈정거리는 몸짓을 하면서 나를 아래위로 훑 어보았다. 눈빛이 적의로 가득 차 있었다. "총통께서 밀파하신 첩자십니까?" "그만해 기욱아. 앉자." 한기욱이 벌떡 일어섰다. 한 대 칠듯한 기세로 다가들었다. "너 돌았냐? 저건 왜 데려왔어. 일을 망칠 셈이야?" "얘기 했잖아." "얘기는 무슨 얘기? 실장한테도 말해보자던 헛소리? 그걸 누가 진담으로 알아들어. 저 새끼가 어떤 새낀지 정말 모르는 거야?" 동훈이 씩씩거리는 한기욱을 끌고 방으로 들어갔다. 차디 찬 시선들이 미동도 없이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무시무시 한 정적이 흘렀다. 감히 앉을 엄두를 내지 못하고 엉거주춤 거실 한가운데 서 있었다. 현우가 없는 자리에서 처음 대하 는, 규율부장 사건에 대한 솔직한 반응이었다. 잠시 후 동훈과 한기욱이 방에서 나왔다. 한기욱은 볼이 부어 내 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모두 앉고 나자 동훈이 말했다. "우리 1반 실장 서지호야. 인사들 하라구." "됐어. 그 자식 모르는 사람이 어딨어? 히틀러 애완견이잖아." 최정안이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솔직히 모두 겁먹고 있어. 저 녀석 안 데려와도 충분할 정도로 말야. 뭐야? 히틀러하고 개인 면담이라도 주선해 보 려는 거야?" 송남규였다.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했다. 구태여 감추려고 하지도 않았다. 모두들 그와 비슷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여 기저기서 한마디씩 툭툭 내뱉었다. "누구누구 모이고 무슨 얘기 했는지 외우려면 정신 바짝 차려야겠다. 눈치볼 것 없이 그냥 수첩에다 적어." "평소에 참 궁금했는데 늬들같은 갑부 새끼들이 상납금 걷어다 어디 쓰냐? 천국 가려고 불우이웃 돕냐?" "왜 그렇게 풀이 죽었어? 형님 없으니 불안하지? 나 같은 놈이 감히 맞먹어도 되는 건지 모르겠네" "뭘 봐? 지금껏 벌레로 알던 게 말을 하니 놀랍냐?" 모두가 다투어가며 거들었다. 분위기가 차츰 험악해져 가 는데도 동훈은 딴전을 부리듯 앉아서 그들이 하는 대로 내 버려두고 있었다. "8반 신종태 평생 왼팔이 구부러진 채로 살아야 한다는 거 알아? 얼마나 교육을 잘 시켜놨는지 부모님은 물론이고 우리한테까지 유리창 닦다 떨어져서 다쳤다 그러더라. 돈없 고 싸움 못하는 놈들은 인간으로도 안 보이지? 네가 당했다 고 한 번 생각해 봐 자식아!" "선생이란 작자들부터 잡아야 해! 저번에 장우 당한 것 교무실 앞이었어. 다들 못 본 척하는 거 봤지? 정안이가 항 의하니까 오히려 일주일 정학 때렸잖아. 씨팔, 우리가 나찌 스 밑이나 닦아주러 비싼 등록금내고 학교 다니냐? 대체 뭘 가르치는 학교냐? 앞으로 사회 나가서 힘센 놈들한테 반항 하지 말고 따까리 노릇이나 충실히 하라는 거냐?" "저번에 김준태 새끼, 영철이가 상납금 안 낸다고 걔네 집까지 쫓아가서 영주 누나 건드린 거 선생들이 쉬쉬하고 덮어버렸어. 그래서 경찰에 고발했는데 그놈들도 한통속이 었대. 나찌스 놈들이 영철이네 집에 떼로 몰려가서 떠들고 다니면 죽인다고 얼마나 협박했는지 견디다 못해 고소 취하 하고 이사가 버렸잖아." "씨팔 새끼들." "너희가 뭐야? 왕이야? 무슨 권리로 세금 걷고 사람을 죽 이고 살리는 거야?" "시끄러!" 거의 멱살잡이까지 갈 상황에서 갑자기 한기욱이 버럭 소 리를 질렀다. "이년 동안이나 꼼짝 못 하고 당해온 주제에 무슨 낯짝으 로 할 말들이 그렇게 많아? 부끄러운 줄 알아라 새끼들아! 지금이라도 당장 히틀러가 나타나면 바지에 오줌싸면서 내 뺄 놈들이!" 현우는 고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클럽을 만들었다. 모두 들 뒤에서 나찌스라고 부르는 그 클럽은 총 마흔 여덟 명으 로 같은 일학년들로만 구성되어 있었다. 클럽을 결성한 뒤 현우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상납금 징수였다. 현우가 정해놓 은 순서에 따라 각반 나찌스 회원들이 아이들에게 오천원씩 걷는 돈으로, 현우의 권위를 확인해 보는 일종의 실력행사 같은 것이다. 순번은 거의 한 달에 한 번꼴로 돌아갔다. 안 내거나 반항하는 아이들은 죽지만 않을만치 패고 다른 애들 을 위협해서 따돌리게 했다. 학교생활이 하루하루가 살얼음 판이었다. 동급생에게 존대말을 강요하고 거부하면 집단으 로 폭행했다. 2학년에 올라와서는 그 정도가 더 심해졌다. 우리 반에는 부실장 한승수가 주축이 된 패거리가 있다. 2학기 초에 동훈이 전학오고 한기욱이 그와 어울리면서 묘한 긴장감이 돌기 시작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지만 한승 수는 그쪽에 신경쓰지 않았다. 보고가 올라가지 않았으니 7 반인 현우는 당연히 모를 것이다. 즉, 지금 이상의 기회는 없다는 얘기였다. "하고 싶은 말들이 많겠지. 지금 이 상태가 계속된다면 하고 싶은 말은 더 많아질 거고" 동훈이 천천히 말을 꺼냈다. "그래서 우리가 모였어. 개개인의 힘만으론 어려운 일이 었지만 이렇게 뭉친 이상 그들에게 꿀릴 이유가 없어. 더구 나 아이들 절대다수가 잠정적으로는 우리와 생각이 같아. ...알겠지? 우리는 그들과 비교도 안될만큼 강하다구." 좌중은 눈도 깜박이지 않고 그를 응시했다. ...그래, 어쩌 면 뭔가 이루어질 지도 모른다. 나는 새어나오려는 탄성을 손으로 막았다. 그와 함께라면 현우에게서 벗어날 수 있게 될 지도 모른다. "디데이가 바로 내일로 다가왔어. 저번 모임에서 표결된 것처럼 이 학년 열 두반 전체에서 상납금 거부와 함께 운동 장에서 연좌 시위를 하고 5교시에 있을 학부모 회의에서는 우리 스물 세 명의 명의로 된 연판장을 공개하는 거야. 수 가 많을수록 좋겠지만 아무래도 일이 커지다 보면 나찌스가 냄새 맡을 확률 또한 커지는 거니까..." "잠깐, 스물 세 명이라니? 우린 스물 두 명이잖아." 조현식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몇몇의 시선이 나에게 쏠렸다. 다음 순간 어처구니 없다는 듯한 웃음이 흘러 나왔 다. "설마..." "정말 웃기고 있군. 저 새끼가 뭐가 아쉬워서 우릴 도와? 꿈꾸지 말고 히틀러한테 쑤시지 않기나 바래." 한기욱이 코웃음을 치며 감정이 실린 눈빛을 쏘아왔다. 그래. 난 현우가 무서워. 너도 마찬가지 아냐? 혹시 내가 너희와 다른 인간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지호가 진심으로 나찌스하고 어울리는 것 같아?" 동훈이 말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하려는지 짐작했으면서도 와줬어. 함 부로 말하지 마. 너희가 지호 입장을 조금이라도 이해한다 면 그런 식으로 말할 수는 없어." 그는 차분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부담 갖지 말아. 연판장에 네 자리는 남겨 놓을 테니 마 음이 결정되는 방향으로 해." 현우, 아버지, 지하실이 언제나처럼 순차적으로 떠올라왔 다. 춥고 음습한 지하실의 어둠 속에서 무엇인가 소리없이 다가들던 때의 공포가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동훈이, 형이, 말하고 있었다. 지하실을 아버지를 현우를 깨부숴 버리라고. "어제는 어떻게 된 거야?" 1교시 대의원 회의 시간에 현우가 옆에 앉으며 말을 건넸다. "집에도 없고. 준태 귀 뺀 날이라 모이자니까." "잊어 버렸어." "뭐, 할 수 없지." 그는 다리를 길게 뻗고 앉아 무심하게 말했다. "믿어줄 테니까 노래나 한 곡 불러봐." "...지금?" "올드 앤 와이즈 Old and Wise" "......." "안 들려?" "나중에 할께." 불쾌한 듯한 눈초리가 날카롭게 쏘아져왔다. 무슨 말인가 하려다가 참는 눈치였다. 잠시 후에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 주말은 비워 둬. 물 좋은 년 몇 잡아서 양평 별장 에 갈 거니까. 대장이 돌았는지 총 맞았는지 보통 극성이 아니야. 지겨워서 대피 좀 해야겠다." "미안해. 힘들겠어." "왜?" "...그게...." "느이 대장 때문에?" 현우에게 있어서만큼은 아버지는 핑계거리가 못 됐다.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몸도 별로 안 좋고... 시험도 얼마 남지 않았고..." 그는 어이가 없는 듯 나를 바라보더니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그리고?" "......." "너 요새, 여엉 맘에 안 드는데? 뭘 그렇게 비싸게 굴어. 봐주는 것도 한 두번이야, 썅!" 나도 모르는 새 몸이 흠칫 물러났다. 현우는 험악한 얼굴로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묵묵히 앉아 있었다. 잠시 후 학생회장이 들어오고 회의가 시작되었다. 회의시간 내내 현우의 침묵에 신경이 쓰였다. 그러고 보니 요사이 들어 그의 제안에 동의한 기억이 없다. 동훈이 오기 전에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회의가 끝나고 한승수를 위시한 나찌스가 몰려 들었지만 어울리지 않고 나왔다. 뒤통수에 현우의 시선이 느껴졌다. 점심시간에 황윤석이 이대홍에게 무슨 말인가 꺼내고 있 었다. 밖으로 나오라는 듯한 몸짓을 곁들여서였다. 이대홍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픽 코웃음을 섞어서 모두가 들을만 한 목소리로 "어쭈, 개겨 보겠다고?" 하더니 갑자기 이대홍 의 머리를 뻑 소리가 나게 갈겼다. 시선이 일시에 쏠린 가 운데 본격적으로 이대홍을 밀어 붙이려 할 때 뒤에서 동훈 이 황윤석의 어깨를 잡아챘다. "뭐얏!" 황윤석이 돌아서며 꽥 고함을 질렀다. "한국말 못 알아들어? 없다잖아." "상관말고 찌그러져. 좆도 모르면 가서 똥이나 퍼!" "안 그래도 널 퍼내려는 중이다." "이 새끼가 근데" 약이 바싹 오른 황윤석이 다짜고짜로 주먹을 휘둘렀다. 동훈은 쉽게 피했다. 황윤석의 뒤로 돌아가 팔을 꺾어서 홱 밀쳐 버렸다. 책상이 넘어지는 요란한 소리가 났다. 아이들 이 튀듯이 비켜서면서 우르르 창문 쪽으로 붙었다. 황윤석 은 책상 밑에 깔린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한승수가 일어섰다. 조석원, 장운상, 홍주익, 김준태들도 입매를 굳히며 따라 일어섰다. 살벌한 분위기였다. 한승수가 한마디 한마디를 씹듯이 내뱉었다. "저 분 아주 무서운 분이신가 봐. 어이, 이제껏 몰라뵈서 정말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어." 그들은 가로막힌 책상을 걷어차며 동훈에게 다가갔다. 동 훈의 주변자리에 남아있던 아이들이 하나둘 일어나 주춤주 춤 물러서고 있었다. "야, 문 옆에 병신들 문 잠가. 지금부터 움직이는 새끼는 다 죽인다. 거기! 어떤 씨팔이 움직여?" 홍주익이 일어서려는 아이에게 걸상을 집어던졌다. 안경 이 날고 얼굴을 감싸며 주저앉는 손가락 사이로 핏물이 주 르르 흘러내렸다. 얼어붙은 교실 안에서는 숨소리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교실의 앞뒷문을 지목당한 애들이 하얗게 질린 채 잠그고 있었다. 황윤석이 비틀비틀 일어났다. 코 아래쪽부터 교복 앞섶까 지를 붉게 물들인 피가 턱을 타고 아직도 흘러내리고 있었다. "개새끼...!" 동훈에게 덤벼들려는 황윤석을 한승수가 팔을 뻗어 막았다. "천천히 하자구, 윤석아. 서둘 것 없어." 한승수는 동훈을 한 차례 훑어 보았다. "전학왔을 때 잡았어야 하는 걸 우습게 보고 놔뒀더니 그 당장에 기어오르누만. 재촉 안해도 차례되면 어련히 손봐줄 텐데." 동훈은 나찌스에게 둘러싸여 섬처럼 홀로 서 있었으나 조 금도 위축되어 보이지 않았다. 그는 형만큼 순결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가 침착하게 말했다. "너희는 무슨 권리로 이런 짓을 하는 거냐? 우리가 언제 까지 참아 줄 거라고 생각해? 지금이라도..." 나찌스가 허리를 꺾으며 교실이 떠나가라 웃어젖혔다. 한 동안 그들의 웃음소리에 귀가 멍멍할 지경이었다. 폭소를 못이겨 컥컥거리면서 한승수가 눈어귀로 흐른 눈물을 닦았 다. "어이 선생, 개그맨 해도 되겠는데... 대성하겠어. 뭐래니, 언제까지 참아줄 거라고 생각해?" 다시 한 번 비명 같은 폭소가 터졌다. 그 가운데에서 동 훈은 담담한 얼굴로 서 있었다. 무심한 듯한 그 얼굴은 언 뜻 몹시도 차가워 보였다. 장운상이 웃으며 그를 떠밀었다. 그가 몇 발자국 앞으로 밀렸다. 나찌스의 원이 좁혀져 있었 다. 한승수가 친근하게 동훈의 어깨를 두들기며 말했다. "건방진 새끼." 동훈이 허리를 접으며 휘청거렸다. 한승수는 그의 복부를 찍었던 무릎을 그대로 가슴 복판까지 걷어 올렸다. 그 일격 을 신호탄으로 일방적인 난타가 시작되었다. 동훈은 바닥에 깔리지는 않았지만 여섯 명을 상대로 한 방어에는 한계가 있었다. 어쩔 도리없이 점차로 막는 수보 다는 맞는 수가 더 빈번해지고 있었다. 단추가 뜯겨나가 맨 살이 보이는 가슴에 점점이 핏물이 튀었다. 이마에서 터져 나온 피가 눈 속으로 스몄다가 다시 눈시울을 타고 길게 흘 러내렸다. 핏물이 스며든 눈을 감은 동훈이 김준태에게 옆 구리를 채이고 한쪽 무릎을 꺾으며 넘어진 위를 나찌스가 막 덮치려 할 때였다. 누군가가 벼락처럼 고함을 질렀다. "야, 이 더러운 자식들아! 어디 나하고도 한 판 떠보자! 늬들은 비겁한 종자들이라 일 대 일로는 못 놀지? 혼자서는 오줌도 못 싸지?" 한기욱이었다. 어제 정했던 타이밍대로였다. 본보기를 보 이려다가 기습을 당한 한승수들은 상황판단을 못하고 멍청 히 서 있었다. 그들은 이제껏 자기들에게 싸움 거는 녀석을 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상대는 그 누구도 아닌 바로 한기 욱인 것이다. 전국 아마복싱 미들급 챔피언이 이렇게 나오 는데 겁 안 먹을 강심장은 드물었다. "덤벼 보라니까!" "이 자식이 미쳤나?" 한승수가 험악하게 되받았으나 주춤하는 기색이 역력했 다. 도움을 청하는 듯 은연중에 내게 시선을 보내왔다. 한기 욱이 그들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나찌스가 움찔 몸을 사리며 물러섰다. 현우가 물러서고 있었다. 현우를 부수면 형도 별채에서 나올 수 있을 것이다. 동훈처럼 건강한 모습 으로...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모르지만 떠오르자 마자 확신으로 바뀌었다. 나도 모르게 주먹이 부르르 떨렸 다. 전신의 피가 역류하는 것 같았다. 다음 순간 나는 소리 치고 있었다. "이 학교의 주인이 누구냐? 우리야! 저 놈들이 아니라 바 로 우리란 말이다!" 아버지가 물러서고 있었다. "왜 천 육백 명이 마흔 여덟 명에게 당하고 있는 거야? 어째서 참고만 있냐구? 우리가 뭉치면 아무 것도 아닌데!" 결코, 다시는, 지하실에 갇히지 않을 것이다. 나찌스가 경악과 불신으로 얼어붙어 있었다. 한기욱이 믿 기지 않는 듯한 얼굴을 하고 나를 바라보았다. "시,실장... 너..." 한승수가 더듬거렸다. 웅성거림이 일었다. 동훈의 피를 보 고 격앙되어 있던 아이들이 창문가에서 조금씩 앞으로 밀려 나왔다. 나찌스가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가고 있었다. "비,비켜 병신들아! 뭐하는 거야?" 불안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며 조석원이 이맛살을 구겼다. 김준태가 인상을 쓰면서 위협적으로 한 발 내딛자 그쪽에 서 있던 아이들이 흠칫 뒷걸음질을 쳤다. "비켜!" 퇴로를 연 나찌스가 허둥지둥 교실을 빠져나갔다. 그들이 꽁무니 빼는 모습을 보기는 처음이었다. 동훈이 웃으며 내 게 엄지 손가락을 세워 보였다. 한기욱이 흥분한 아이들을 향해 외쳤다. "실장 말 들었지? 우리가 뭉치면 저깟 놈들 좆도 아니야! 학교에서 몰아내 버리자구! 모두 나가서 우리의 의지를 표 명하자!" 한기욱의 뒤를 서른 명 가량이 따라 나갔다. 운동장에는 각 반에서 모여든 아이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그 점심시간에 2학년 열 두반 중 현우의 7반, 그와 같은 복도에 있는 5,6,8반을 제외한 여덟 반에서 우리와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조현식과 최정안이 교문 바깥에 숨어서 회 의에 참석하러 오는 학부모들에게 연판장의 사본을 나누어 주고 있었다. 일대 소란이 일어났다. 진위를 묻는 학부모들 과 운동장에서 연좌 시위를 벌이고 있는 삼백여 명의 학생 들을 수습하느라 교무실이 온통 벌컥 뒤집혔다. 천지개벽 같던 그날은 학부모 회의를 취소하고 시위에 참 가했던 학생들을 매타작하는 것으로 마감했다. 이것이 얼마 나 부적절한 대응이었는지는 그 다음날로 확연히 드러났다. 학생들 사이로 불만과 항의의 소리가 불붙듯 번져갔다. 하 루 종일 학부모의 전화가 빗발쳤다. 교육청에 투서가 들어 갔는데도 현우 때문에 감히 사람을 보낼 엄두를 못 낸다는 소문이 돌았다. 연일 시끄럽기만 할뿐 학교 측에서는 이렇 다할 수습책을 내지 못하고 있었다. 나찌스를 내버려 두자 니 학생들이 무섭고 처벌하자니 눈 앞이 캄캄할 것이었다. 마침내 닷새의 여유를 두고 다음 주 월요일에 학부모가 참 석한 가운데 선도 위원회를 개최하기로 결정이 났다. 이 모든 과정에 있어서 현우와 나찌스는 오싹하리만치 잠 잠했다. 선전포고에 대해 어떠한 반격도 해오지 않았다. 반 (反) 나찌스 움직임에 대한 시비나 폭행이 전혀 없었다. "놈들이 무슨 생각으로 가만 있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방심해선 안돼." 동훈은 행동을 같이 해온 반(反) 나찌스 각 반 대표들에 게 피해자의 증언을 기록해 오게 했다. 그 결과 상납금과 부당한 폭력 등에 대해서는 꽤 진척을 보고있는 상황이었으 나 규율부장 사건만은 제자리 걸음이었다. 여전히 목격자들 은 조개처럼 입을 다물고 있었다. 담임 대신 출석부를 정리해서 교무실 칠판에 기재하고 나 오는 길에 동훈과 마주쳤다. "어디 가?" "자료실에. 다음 시간 지리잖아." "실장은 주번에서 제외되는 법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 "농간의 냄새가 짙은 악법이지. 실장이면 급우들을 위해 조금이라도 더 봉사해야 하는 것 아냐?" 주번인 동훈이 투덜거렸다. 자료실 창문턱에 기대서서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눈이 시리도록 맑은 청색이었다. 마치 대지의 생명력이 비쳐져 있는 듯했다. 이 며칠간 세상은 무한히 아름다웠다. 엄마와 형이 모두 건강하게 살아있던 그 시절처럼.... 산다는 것이 이토록 즐 거운 일인지 까맣게 잊고 있었다. "맘에 드는 새끼 것 빠니까 좋아?" 돌연 냉소어린 음성이 날아왔다. 괘도를 찾고 있던 동훈 이 흠칫 놀라 일어섰다. 현우가 등 뒤로 손을 돌려 문을 잠갔다. "얼굴이 확 폈는데 그래. 살맛나는 모양이지?" 동훈이 내게로 다가오는 현우를 막아섰다. 현우는 파랗게 불똥이 튀는 눈길을 그에게 돌렸다. "최동훈이라고 했나?" "......." "좋아, 선동가 선생. 서지호를 끌어 들이다니 대단하지만 저 새끼만은 안돼. 내가 어떻게 돌아 버릴지 나도 잘 모르겠거든." "할 말이 있으면 월요일 모두 앞에서 해라. 이제 지호는 너하고 개인적으로 만날 일 없으니까." 현우가 소리없이 웃었다. 하얀 이가 차갑게 빛났다. "뭐라고, 씹쌔꺄?" 일 대 일로 붙어서 현우를 이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물론 동훈도 알고 있을 것이다. 동훈의 등이 긴장으로 돌처 럼 굳어 있었다. 현우가 한 걸음 다가들었다. 그 순간 요란 한 소리와 함께 문이 부서져 나갔다. 한기욱과 반(反) 나찌 스 대표 몇이 뛰어 들어왔다. "괜찮냐? 히틀러 새끼가..." 한기욱이 고함을 지르다가 현우와 눈이 마주치자 입을 다 물었다. 질식할 것 같은 침묵이 흘렀다. 현우가 타는 듯한 시선을 나에게 던졌다. "지금이라도 와서 빌면 없었던 일로 해주지. 사람이란 가 끔 실수할 때도 있는 거니까.... 토요일까지 기다리겠어. 오 는 게 좋을 거야, 서지호. 나한테도 너한테도 네 떨거지들한 테도." 그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내가 떨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모두들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내 자신이 너 무도 혐오스러웠다. "...규율부장 사건, 내가 쓸께." 한기욱이 눈을 크게 떴다. "내가 쓰겠어." "좋아, 됐어!" 동훈이 소리치며 내 손을 덥썩 잡았다. "이젠 우리가 이겼어!" 한기욱은 아무 말 없이 손을 뻗어 내 앞머리를 흐트러 놓 았다. 내가 본 대로 썼다. 기억을 더듬을 것도 없었다. 바로 어 제 본 것처럼 머리속에 또렷이 새겨져 있었다. 유월 초의 일이었다. 그 3학년 규율부장은 현우의 빈번한 상급생 폭행에 이를 갈고 있던 중이었다. 어느날 복도에서 현장을 잡은 규율부장이 현우의 뺨을 연거퍼 후려갈기며 으 르렁거렸다. "대한민국에서 빽이 세 손가락 안인 게 니 아 버지지 너냐? 지랄하지 마라 응... 확 밟아 버리기 전에. 알 아 처먹어 새꺄?" 일주일 후 그는 체육관 뒤에서 등뼈와 양쪽 무릎이 완전 히 뭉개진 채로 흙바닥을 기고 있었다. 나찌스와 규율부 전 원 앞에서였다. 현우는 주먹에 묻은 피를 닦으면서 무심하 게 말했다. "너희들은 나가서 본 대로 말해도 좋아. 이 새끼가 누구 한테 맞아서 병신이 됐는지. 아니꼬와도 성질 좀 죽였어야 “ “한상욱." "옛?" 한기욱의 동생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나찌스가 그 주위 로 몰려들었다. 현우는 나를 힐끗 쳐다보더니 체육관 뒤를 돌아 나갔다. 3반 나찌스의 리더인 홍성태가 한상욱의 뺨을 토닥거렸다. "왜 그래? 규율부 내 군기 잡는 과정 중에 과다한 기합을 못 견딘 일학년이 반발한 거잖아. 바로 네가 말야." "...그...그런..." 한승수가 와락 인상을 구기며 한상욱을 떠밀었다. "네가 아니면 그럼 누구야? 너희들, 한상욱이 규율부장 패는 거 봤어 안 봤어?" 규율부는 고개를 떨군 채로 침묵을 지켰다. 어쭈 이것들 이, 나찌스가 잇새로 거친 숨을 토하며 그들을 사정없이 두 들겨 패기 시작했다. 비명과 신음이 살이 터지고 뼈가 부러 지는 소리와 함께 섞여 들었다. "우리 시간 많어. 걱정말고 개겨." 쓰러져 뒹구는 규율부의 몸 위로 무자비한 발길질이 날아 들고 있었다. 나는 옮겨지지 않는 발길을 떼어 될 수 있는 한 표나지 않게 그 곳을 벗어났다. 현우는 자신의 권위가 걸린 폭력의 현장에는 늘 나를 참석시켰다.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나는 나찌스가 아니다. 그것은 물론 현우도 알고 있다. 그렇다면 왜? 그 길고긴 운동장을 가로지르면서 나는 무력한 자신이, 잡아끄는 대로 끌려 다니는 자신이 지긋지 긋하게 경멸스러웠다. 규율부의 증언에 따라 한상욱이 혐의를 받고 경찰서에 잡 혀갔지만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한기욱이 눈에 불을 켜 고 규율부를 찾아다니며 잡아 족쳤으나 겁에 질린 그들에게 서 바른 말이 나올 리가 없었다. 며칠 후, 귀가하는 길에 기다리고 있던 한기욱과 마주쳤 다. 골목으로 끌려 들어갔다. "말해. 너도 양심이란 게 있으면 사실대로 말해! 지금 당 장 경찰서에 가서 네가 본대로 말해! 이 개자식아, 상욱이 는 부모도 없이 컸어. 너희가 뭔데 걜 망치려고 해? 씨팔놈 들, 다 작살내 버릴 테다!" 억센 손아귀가 목을 조르며 벽에 머리를 짓찧어댔다. 가 슴이 터질 듯 답답하고 눈 앞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노랗고 파란 점들이 몰려들었다가 다시 소용돌이처럼 퍼져 나갔다. 막 의식을 놓치려 할 때 갑자기 숨통이 트여왔다. 무너지듯 무릎을 꿇고 엎드려 막혔던 숨을 발작적인 기침과 함께 한껏 들이 마셨다. 어딘가 아주 멀리서 한기욱의 악에 받친 고함소리가 몽롱하게 들려왔다. 너 같은 놈이 실장은 무슨 실장이야 히틀러 똘마니 새끼가. 치사한 새끼. 그래 내 동생 소년원에 처넣고 나니까 기분 째지냐? 현우가 내려다보고 있었다. 내가 고개를 들자 일어나서 골목을 걸어 나갔다. 그 이후로 여름방학 때까지 어딜가든 나에게는 두 명씩 나찌스가 붙어 다녔다. 맨 끝에 반 번 이름을 쓰고 지장을 찍었다. 이튿날인 토 요일 아침에 증언들이 수록된 파일과 함께 교장에게 제출되 었다. 퇴학 정도가 아니라 형사 입건 시키기에도 부족함이 없는 내용들이었다. "날고 겨도 안 될걸." 모두가 승리의 함성을 지르며 길길이 뛰었다. 숨이 넘어 가도록 웃어 제꼈다. 통행금지가 없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열 두시 넘어 돌아다니는 것이 유행처럼 여겨졌다. 자정이 지나자 대부분 집에 가고 나와 송남규, 그리고 동훈은 한기욱의 집 에서 잤다. 귀가 시간이 여덟 시만 넘어도 발작하는 아버지 를 생각하면서 웃었다. 아무 것도 두렵지 않았다. 현우를 부 수고 아버지를 부수고, 지하실을 부순다. 그리고... 별채를. 형, 내가 구해줄께. 우리 다시 광주로 가. 애초에 아버지 한테 오는 게 아니었어. 엄마가 없어도 그대로 광주에 있었 어야 했어. ...그랬다면 형은 열사가 되지 않았을 것이고 난 현우를 영원히 모르고 살았을 텐데.... 괜찮아, 형. 이제부터라도 우린 다시 시작할 수 있으니 까... 사랑해, 형.... 난 언제나 엄마랑 셋이서 살던 때 꿈을 꿔. 새벽 두시 넘어 어렴풋이 잠이 들었을 때 어디선가 선뜻 한 기운이 느껴졌다. 누가 창문을 연 모양이라고 생각하다 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겨울과 다름없는 11월에 자다말고 창문을 여는 사람은 없다. 자료실에서 현우가 내뱉던 말이 날카롭게 스쳐갔다. 토요일까지 기다리겠어. 오는 게 좋을 거야, 나한테도 너 한테도 네 떨거지들한테도. 소스라쳐 몸을 일으키려 할때 누군가가 목덜미를 거세게 찍어 눌렀다. 뒤통수에 둔한 충격이 가해지는 것을 느끼면 서 정신을 잃었다. 지독히도 차가운 물을 뒤집어 쓴 것 같았다. 주위의 소리 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신음이 절로 흘러 나왔다. 욱신거리 는 머리를 간신히 가누면서 눈을 떴다. 천장에 매달린 백열 전구가 따갑게 쏘아 들었다. 시력이 조금씩 회복되어 가면 서 반(反) 나찌스 대표들이 모두 손이 뒤로 돌려 묶인 채로 줄지어 무릎을 꿇고 있는 것이 보였다. 우리 정면의 벽에 기대어 차곡히 쌓여진 궤짝을 의자삼아 누군가 앉아 있었다. 상체가 그늘 속에 묻혀서 보이지 않았 지만 앉아있는 모습이 현우가 틀림없었다. 내 옆에서 동훈 이 의식을 회복하는 듯 몸을 뒤척였다. 그 역시 손이 묶여 있었다. 나찌스 전원이 손에 야구 방망이나 못이 돌려박힌 각목을 들고 우리 주위를 뺑 둘러 서 있었다. 동훈이 힘들 게 일어나 앉았다. 주위를 둘러보던 그의 시선이 현우에게 가 멈췄다. 이곳이 어딘지 알 것 같았다. 몇 년전 버스회사가 도산하 면서 같이 버려진 화물창고였다. 한기욱의 집에서 얼마 떨 어지지 않은 곳이다. 아마도 한기욱의 집 근처에서 기다렸 다가 귀가하는 아이들을 하나씩 잡아들인 모양이었다. 현우가 무릎 위에 팔꿈치를 얹으며 몸을 앞으로 내밀었 다. 비로소 그의 얼굴이 불빛 속에 드러났다. 백열등을 받은 그 얼굴은 더할 수 없이 비인간적으로 보였다. "멍청한 짓을 했어. 아들이 새벽까지 집에 안 들어왔을 때 신경 안 쓸 부모가 몇이나 될 것 같아? 그것도 스무 명 도 넘는 수가 말이야." 한기욱이 현우에게 말했다. "그거라면 염려할 것 없어. 모두들 전화부터 하게 했으니 까. 친구 집에서 푹 자고 있는 줄 알거야." 한승수가 실소를 흘리며 대꾸했다. 어깨를 한 번 격하게 뒤채더니 한기욱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야, 유현우! 똥폼 좀 어지간히 잡어! 찜쪄먹든 구워먹든 꼴리는 대로 해! 어차피 넌 끝났어. 발악해 봤자라구 미친 놈아!" 야구 방망이가 양쪽에서 그의 어깨를 사정없이 후렸다. 이를 악물고 참아내는 얼굴에 식은땀이 배어났다. 현우는 한기욱의 말을 들은 성 싶지도 않았다. 내처 동훈에게만 시 선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동훈 역시 말없이 그를 주시했다. 마치 눈싸움이라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현우가 천천히 일 어나 동훈 앞에 섰다. "오늘 너희가 제출한 고발장과 백 명 가까이 되는 녀석들 의 증언기록을 봤지. 명작이더군. 규율부장 얘기 말야" 칼바람이 유리창을 박살낼듯 한 차례 요란하게 휘몰아쳤 다. 어쩔 수 없이 선도 위원회를 열어야 할 궁지에 몰린 교 장이 대비책을 강구하도록 파일을 현우에게 보여준 모양이 었다. "분명히 경고했는데, 서지호만은 안된다고. 왜 말 안 들 어? 굳이 저 새끼 시켜서 날 좆 만들려는 이유가 뭐야?" 현우는 표정에 변화없이 나직하게 인사말을 건네듯 말했 다. 곧 무언가 끔찍한 일이 벌어질 전조였다. 자제할 수 없 을만큼 화가 났을 때 그런 말투를 썼다. "누구도 시킨 적 없어. 지호 자신의 의지로 참가했어." "오." 현우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걸어가다가 송남규 앞에 멈춰 섰다. "자신의 의지로." 송남규는 공포와 적의가 반반 섞인 눈빛으로 주춤거리며 현우를 올려다 보았다. 현우가 냉담하게 명령했다. "죽여." 못박힌 각목이 바람소리를 내며 송남규의 목덜미를 파고 들었다. 그가 캭, 목이 비틀리는 닭 같은 소리를 내며 모로 쓰러졌다. 그 위를 각목과 야구 방망이가 어지럽게 날았다. 처절한 비명이 무엇인가 터져나는 습기찬 소성과 단단한 것 이 바스러지는 소리에 섞이며 조금씩 잦아들다가 어느 한순 간 잠잠해졌다. 송남규는 허리가 직각으로 꺾이고 팔과 다리가 이상한 각 도로 뒤틀려 있었다. 머리 한쪽이 함몰된 모습으로 구겨진 빨래처럼 널부러져 움직이지 않았다. 비명섞인 웅성거림이 일어났다. 몽둥이가 휘둘러지고 몇 차례 비명이 인 후에 창 고 안은 다시 쥐죽은 듯 고요해졌다. "좀 낫군. 시건방진 새끼들은 질색이라서 말야.... 피곤한 시간이니 빨리 끝내고 집에 가서 한잠씩 붙이도록 하자구." 현우가 송남규의 시체를 넘어서 궤짝 위에 앉으며 말했 다. 간간히 숨죽인 흐느낌이 흘러 나왔다. 모두들 앉은 자세 를 지탱하기가 힘들 정도로 겁에 질려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나와 같은 방에서 자고 있었던 그가 파리 목숨만도 못한 취급을 받으며 살해되다니, 거짓말이다. 이런 게 사실일 리가 없다. 나는 꿈을 꾸고 있는지도 모른 다. 그래, 이건 꿈이다. 꿈이 깨고 나면 우린 선도 위원회에 서 현우를 쓰러뜨릴 것이고, 난 형과 함께 광주로 돌아갈 것이다.... "지금부터 각자에게 나눠주는 쪽지의 내용을 잘 외워뒀다 가 월요일날 그대로 말해. 한 자라도 틀렸다간 이곳에서 다 시 만나게 될 거야." 종이 한 장씩이 나누어졌다. 얼토당토않은 거짓말들로 가 득 채워진 그것을 공포로 제 정신이 아닌 아이들이 멍하니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런 말 같지도 않은...." 8반의 이재협이 중얼거렸다. "죽여." 가차없이 야구 방망이가 날아 들었다. 이재협의 이마가 퍽 소리를 내며 터졌다. 강명섭이 부들부들 떨며 오줌을 지렸다. 몇 명인가 의식 을 잃은 듯 앞으로 고꾸라졌다. "얌전히 시키는 대로 할까 순번 정해 죽을까?" 현우가 벽에 등을 기대면서 말했다. 마치 저녁으로 전골 을 먹을까 매운탕을 먹을까 하는 것 같았다. 그가 최정안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응?" 최정안이 이를 딱딱 맞부딪치며 헛바람이 새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시, 시, 시키는 대로... 뭐...든 시키는 대로 할께요. 자, 잘못했어요... 다 다시는... 제발... 사, 사, 살려줘요... 살려... 주세요..." 현우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나찌스들이 몽둥이를 내 리고 한 걸음씩 뒤로 물러났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에 현우가 테스트를 시작했다. 모두들 필사적으로 외운 내용을 반복했다. "삼십 분 후 동이 트면 귀가해도 좋아. 허튼 소리는 일체 입 밖에 내지 마. 혓부리 단속 제대로 안 하는 놈은 이 세 상 어디로 사라지든지 반드시 찾아내서 목구멍을 찢어 주겠 어." 종이를 수거한 후 한 사람씩 결박을 풀어 주었다. 네 시 간이 넘도록 꿇어 앉아있던 다리에 피가 통하면서 걷기는 고사하고 일어서지조차 못했다. 그러나 네 발로 기어서라도 한시라도 빨리 그 창고에서 벗어나려고 모두들 안간힘을 쓰 고 있었다. 동훈과 한기욱은 창고기둥에 비끄러 매졌다. 현우가 말했 다. "너희는 월요일 아침까지 여기 있어줘야겠어. 내가 애써 준비한 쑌데 도망이라도 쳐서 못 보게 되면 섭섭하잖아. 월 요일 회의 끝나고 따로 할 얘기도 있고 말이야." 나찌스가 송남규와 이재협의 시체를 뒷문으로 내가고 있 었다. 현우는 끝까지 내게 눈길 향하는 법 없이 창고를 나 갔다. 한승수가 내 등을 떠밀었다. 동이 어슴푸레 터오르고 있었다. 학부모 칠십여 명과 주임급 이상의 교사, 교감, 교장이 참 석한 가운데 선도 위원회는 지하강당에서 열렸다. 우리가 제출한 파일의 사본이 모두에게 교부되었다. 구체적인 사례 제시는 거의 빠져 나가고 학생들 대다수가 알고 있는 몇 건 만이 남아 있었다. 나찌스는 대기하고 우리가 먼저 들어갔다. 동훈과 한기욱 은 핏기없이 창백한 얼굴로 발을 끌듯이 걷고 있었다. 그들 을 보면서도 머리 속은 온통 그 종이에 써 있던 내용 뿐이 었다. "회의를 시작하기에 앞서 한가지 슬픈 소식을 전해 드려 야겠습니다." 교무주임이 진짜로 슬픈 표정을 지어 보였다. 무슨 이야 길지 짐작이 갔다. 몸이 더욱 떨려 왔다. "이 자리에 나오기로 되어있던 2학년 8반의 이재협 군과 10반의 송남규 군이 지난 토요일 불량배들에게 큰 변을 당 했다고 경찰에서 알려 왔습니다. 목격자들의 진술에 의하면 범인은 조직 폭력배로 보이는 삼십대의 남자 네 명이라고 합니다. 피지도 못하고 꺾여버린 그들을 위해서 함께 기도 를 올립시다." 새벽에 들어간 나를 보고도 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 았다. 가정부가 간밤에 현우가 아버지에게 전화했다고 귀띔 해 주었다. 아버지가 잠잠했던 이유였다. 일요일 내내 방 한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꼼짝도 하지 않 았다. 눈만 감으면 죽음이 코 앞을 스치던 창고 속으로 다 시 돌아갔다. 월요일이 오지 않기를 빌고 또 빌었다. "자네가 제출한 기록을 보면 7반의 유현우 군이 주축이 된 일단의 학생들이 동급생을 수시로 폭행하고 금품을 갈취 했다는데 이것이 사실인가?" 진행을 맡은 학생주임이 강명섭에게 묻고 있었다. "예. 선배들도 당한 사람이 많습니다." "3반의 조한영 군. 이들이 시험 때마다 급우를 위협하여 답안지를 보여 주게 했나?" "아예 작성을 맡길 때도 있습니다. 거부란 있을 수도 없 습니다. 그들에게 찍혔다간 학교에서 견뎌 내지 못하거든 요." "1반의 이대홍 군..." 그렇게 차례로 일곱 명의 증언이 이어졌다. 최정안의 증언이 끝나가고 있었다. 그 종이에 쓰여진 바 에 의하면 이때가 바로 내가 나서야 할 차례였다. 그대로 땅 속으로 꺼져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현우는 이 안에는 없었지만 어딘가에서 듣고 있을 것이다. 이재협의 이마가 터지던 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그만해 둬!" 현우 앞에서 연습했던 대로 의자가 넘어지게 자리를 박차 고 일어섰다. "시키는 대로 하고 매 한 번 피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 어! 아닙니다! 그 기록에 쓰여진 것은 모두 사실이 아닙니 다!" 충격에 휩싸인 웅성거림이 퍼져 나갔다. 학생주임이 물었 다. "그게 무슨 말이지?" "비겁한 놈들. 이런 연극은 그만 두자. 부모님들 모시고 거짓말이나 하다니! 모두 최동훈과 한기욱이 꾸민 일입니 다." 대본에는 이때 '몇 명씩 나누어서 부끄러워 하는 듯한, 망 서리는 듯한, 두려운 듯한, 화가 난 듯한 표정을 지으며 동 요하는 기색을 보인다'고 쓰여 있었다. "어느 학교에나 불량배는 있어요. 현우 패는 그런 부류일 뿐이지 여기서 얘기하는 만큼의 악질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 자식들한테서 아이들을 보호해요. 진짜 나쁜 건 이놈들 이에요!" 동훈과 한기욱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목이 잠기면서 그 다음 대사가 나오지 않았다. 현우에 대한 증오가 북받치며 눈물이 돌았다. 조현식은 두려움을 완전히 떨쳐 버리진 못했지만 나의 행 동에 용기를 얻어 나서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요. 위협적인 분위기 속에서 그들이 불러주는 대로 쓴 겁니다. 한기욱은 모두가 무서워 합니다. 하라는 대로 안 하면..." "최 군과 한 군이 왜 그런 짓을 했지?" 강명섭이 얼굴이 시뻘개져서 말했다. "유현우와 그의 친 구들에게 복수하려구요." 학생주임이 놀라는 시늉을 했다. 바쁜 시간을 쪼개어 온 칠십 명의 관객은 질높은 연극을 관람할 권리가 있다고 여 기고 있는 듯 했다. "한기욱의 동생 한상욱이 규율부장을 폭행하고 퇴학당하 여 소년원에서 복역 중인데, 한기욱은 자기 동생의 말만 믿 고 유현우가 한상욱에게 뒤집어 씌웠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이에 불만을 품어 왔습니다." "음, 제출된 기록 중에 있더군. 제출자가... 서지호 군. 강 군의 말이 사실인가?" "......." "서지호 군?" "...사실입니다" 쭈뼛쭈뼛하면서 아이들이 입을 열기 시작했다. 쭈뼛거리 지 않는다고 나찌스한테 여러 번 걷어 채였었다. "어쩔 수 없었어요.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그냥 두지 않겠다고 해서..." "우리들만 얘기 안하면 모를 거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대개 약한 사람 편을 드니까요. 자기들은 고아지만 현우 는..." 그때 학부모 중에 한 명이 손을 들었다. "예. 말씀하십시오." "저도 우리 아이한테서 얘길 들었어요. 몇몇 학생들 때문 에 학교 다니기가 무섭다구요. 선생님은 더 잘 아실 텐데요. 저 학생들은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아요." 뒤에 앉아있던 머리를 짧게 친 여자가 나섰다. "남자애들 은 누구든지 주먹을 쓰면서 커요. 댁에 아이가 약골이라고 다른 애들도 거기에 맞춰야 된다는 거예요? 이러쿵저러쿵하 기 전에 먼저 댁에 아이가 힘을 기르는 수 밖에 없겠네요. 허약한 애들은 어딜 가나 징징거리죠." "그걸 지금 말이라고..." 참석한 학부모의 3분의 2는 나찌스 아들이 무슨 징계라도 당할까 걱정되어 온 사람들이었다. 두 패로 갈라져서 강당 이 떠나가라 싸워대기 시작했다. 덕분에 격노한 동훈, 한기 욱과 치고 받는 결말 부분은 생략할 수 있었다. 나찌스는 원래부터 악하지 않았고 더구나 지금은 개과천 선한 악당 역을 능청스럽게 해냈다. 아이들 손가락 부러뜨 리는 재미로 사는 홍성태는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제가 이렇게까지 사람들에게 미움받고 있는지 몰랐습니다. 어차 피 나란 놈은 누구한테도 사랑받아 본 적이 없으니까..." 송남규의 시체에 제일 마지막까지 각목을 휘두르던 장태 원은, "제가 가장 나쁜 놈입니다. 다른 애들은 처벌하지 마 시고 다 저에게 몰아서 해주세요. 부탁이니 제 친구들은 용 서해 주세요." 학부모와 교사들의 두시간 협의 끝에 나찌스는 닷새의 정 학과 한 달간 반성문을 제출하는 처벌을 받았다. 동훈과 한 기욱은 퇴학이었다. 말없이 띄엄띄엄 교문을 나서는데 어디서 나타났는지 나 찌스가 우리 주위를 둘러쌌다. 모두들 파랗게 질려서 그대 로 얼어붙었다. 현우가 말했다. "최동훈 한기욱 외에는 가도 좋아." 차마 걸음이 떨어지지 않는 듯 안타까운 시선들이 그 둘 에게 향했다. 현우가 냉소를 띠고 우리를 훑어 보았다. "그 마음 눈물겹긴 하지만 남 걱정할 때가 아니지. 신세 는 두고두고 확실하게 갚아줄 생각이니까 말이야." 아이들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고개를 떨구고 떨면서 하나둘씩 느릿느릿 그 자리를 떠났다. 현우 옆을 지나칠 때 그가 내 팔을 나꿔채더니 홱 앞으로 밀었다. 가까스로 넘어 지지는 않았다. "앞장 서. 창고로 간다." 걸어가는데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무릎에 힘이 없어 몇 번씩 고꾸라질 뻔 했다. 짜서 아무렇게나 던져놓은 빨래 같던 송남규의 죽은 몸과, 얼굴이 함몰된 채 숨이 끊어진 이재협이 계속 눈 앞에서 어른거렸다. 맨 마지막으로 들어온 나찌스가 창고 문을 안에서 걸었 다. 동훈은 창백한 얼굴로 현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 어땠어? 일요일을 여기서 보낸 보람이 있지 않던 가?" 한기욱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관자놀이의 근육이 불끈 부풀어 오르고 눈썹이 미간에 깊은 골을 새기면서 팽팽하게 곤두섰다. "그래 정말 재밌었다 백정 놈아. 니 새끼 그 염병할 주둥 아리를 부숴 놓지 않으면 내가 사람이 아니다." 무시무시한 속력으로 현우에게 부딪쳐 갔다. 보이지도 않 게 날아간 주먹이 간발의 차로 현우의 귀 밑을 스쳤다. 연 타로 날린 주먹이 빗나가서 석회벽을 강타했다. 오래된 칠 이 우수수 떨어지면서 마치 쇠공에 맞은 것처럼 벽이 움푹 패였다. 각목이 한기욱의 옆구리를 찍었다. 목과 등판으로 거의 동시에 몽둥이가 들어왔다. 한기욱이 허물어지듯 쓰러 졌다. 그쪽으로 달려드는 동훈을 나찌스 몇이 단단히 붙잡 았다. 동훈이 치를 떨며 소리쳤다. "더러운 짓이야!" 현우가 픽 웃었다. "상관 안해." "더럽게 얻은 승리에 무슨 가치가 있어?" "이런, 몰랐었나? 모든 승리는 다 더러워. 가치? 이긴 것 이상의 가치가 어디 있어?" 동훈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얼굴에서 천천히 핏기가 사라졌다. 현우는 유쾌하게 말했다. "잘 보라구, 선동가 선생. 이겼다는 건 이런 거야." 현우는 한기욱에게 고개를 돌렸다. "넌 네 주먹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한 모양인데, 그렇지? 널 위해서 마련한 선물이 있어." 나찌스가 한기욱을 들어서 기둥을 안도록 묶었다. 그리고 그 앞에 선반을 끌어다가 묶인 양 손을 올려 놓았다. 홍성 태가 히죽거리면서 한기욱의 앞에 한쪽 무릎을 접고 앉았 다. 스패너를 들고 있었다. 그의 손을 쫙 펴서 누르고는 새 끼손가락부터 스패너의 아귀에 물었다. "아아악!" 뼛속이 얼어붙을 것 같은 비명이 터져 나왔다. 꼼꼼히 열 손가락의 관절을 모두 빼놓더니, 스패너의 머리로 시퍼렇게 부어오른 양손을 찍어댔다. 흰 뼛조각이 비죽이 살을 뚫고 나오면서 한기욱은 입가에 거품을 흘리며 의식을 잃었다. "열심히 노력하면 수저 정도는 쥘 수 있을 거야." 나찌스가 피에 절은 살덩이로 변해버린 챔피언의 손을 보 며 낄낄거렸다. 속이 뒤집혔다. 시야가 흔들리면서 자꾸 앞 으로 쓰러지려고 했다. 뒤에서 현우가 한 손을 뻗어 내 목 을 잡고 자기 쪽으로 끌어 당겼다. 어깨에 그의 가슴이 밀 착되었다. 그가 귀에 대고 속삭였다. "기절하면 죽여버릴 테다." 내 목을 쥐고 있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는 희열에 차서 웃고 있었다. "이봐, 선동가 선생" 현우가 다정하게 말했다. "오래 기다렸지? 자격이 충분하니 너도 선물을 받아야 지." 나찌스가 동훈을 의자에 앉히고 등받이에 팔을 돌려 묶었 다. 위에서 꼼짝 못하게 어깨를 내리 눌렀다. 오른쪽 다리를 맞은편 의자에 올려놓고 발목을 잡아 고정시켰다. 한승수가 나에게 야구 방망이를 내밀었다. 멍하니 그것을 꿈 속에서처럼 보고 있었다. 머리가 아팠다. 눈썹 위가 터져 버릴 것 같았다. 현우가 내 손에 직접 야구 방망이를 쥐어 주었다. 그에게 떠밀려 동훈의 앞으로 갔다. "무릎을 쳐. 박살 내버려." 머리 속에서 맥박이 뛰는 것이 느껴졌다. 극심한 두통이 덮쳐 들었다. 눈 앞에 희고 검은 별들이 돌아 다녔다. 현우 가 내 턱 밑에 손을 넣어 고개를 들게 하면서 얼굴을 바싹 들이댔다. "골라 봐. 네 무릎이냐 저 새끼 무릎이냐. 누구 것이든 상 관없어." 동훈과 눈이 마주쳤다. 동공이 크게 열려 있었다. 내 눈도 저럴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마에서 진땀이 기름처럼 배 어났다. "다섯을 세겠어. 그 이후에도 저 무릎이 온전하다면 네가 여기 앉게 될 거야." 둘인가 하나까지 카운트가 떨어졌을 때 손에 완강한 느낌 이 걸렸다가 내려갔다.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를 들었다. 그 리고 폐부를 찢어내는 비명.... 현우가 크게 웃으며 내 허리를 끌어 안았다. 차디찬 칼날 이 목 밑에 세워졌다. "선동가 선생의 새로운 인생을 위한 축가를 불러 줘야지. 나중에 한다고 했었지? 자, 올드 앤 와이즈" "......." 칼 끝이 살을 파고 들어왔다. "인내심 테스트 하지 마. 어서 해!" 나는 노래를 불렀다. As far as my eyes can see... 비명 을 지르며 바닥을 뒹구는 동훈... 형 앞에서. 이봐, 얘기 하나 해 줄까? 여섯 살 때 나는 그만그만한 애들 사이에서 대장노릇을 하고 있었어. 산어귀에 기차길이 있었고, 좀 떨어져서 과수 원 쪽으로 나 있던 공터에 빈 집이 있었는데 그곳이 바로 겨울철 우리들의 놀이터였지. 우린 그 집과 공터에서 지칠 때까지 놀았어. 그러다 재미가 없어지면 그 집에 갖다 놓은 낡은 담요를 말고 한숨 자다가 눈비비며 집으로 돌아가곤 했지. 그날도 매캐한 연기를 맡기 전까지 나는 비몽사몽간이었 어. 띵한 머리를 누르며 문을 열자마자 방안 가득 커다란 불기둥이 확 솟구쳐 들어오더군. 아이들이 말고 있는 담요 에 불이 붙고 아비규환의 비명이 터져 나왔지. 연기 때문에 숨을 쉴 수가 없었어. 나는 키가 모자라는 위쪽의 좁은 창 문을 향해서 필사적으로 뜀뛰기를 했어. 정신이 들었을 때 나는 어른들에게 둘러싸여 있었어. 새 까맣게 타버린 집 앞에 나 혼자 쓰러져 있었다고 하더군. 나머지 아이들? 그 아이들은... 모두 그 집 속에 새까만 재와 함께 있었 지. 제 3장 <1985년 3월> 금요일 조간에 남경수의 기사가 사회면 귀퉁이에 조그맣 게 실렸다. 그것도 묘하게 써놓아서 기사 자체로는 폭행당 해 죽었단 얘긴지 심장마비로 죽었단 얘긴지 알 수가 없었 다. 뉴스에서는 여전히 일언반구의 언급도 하지 않았다. 총장측은 '사건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고 공식 발표했고, 항의와 비난이 물끓듯했다. 그 위에 경찰이 이 사건을 한병 규들이 취중에 저지른 과실치사로 굳히려 한다는 소문이 돌 았다. 현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서라고 했다. 그 때문에 토 요일 오후의 집회는 어느 때보다 격렬했다. 다른 대학에서 도 많이 참가했다. 연사 대부분이 두레 사람들이었다. 세 번 째 연사가 등단하고 모두 함께 출정가를 부르고 있을 때 뒤 쪽에서 날카로운 부르짖음이 터져 나왔다. "살인자 놈들! 살인자 놈들이 간다!" 그 주위에 서 있던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몇 명이 달려 나갔다. 그 뒤를 다시 이삼십 명이 뒤따랐다. 언뜻 보아도 눈에 익은 나찌스Ⅱ 서너 명이 추격자들을 피해 공대 건물 옆으로 나 있는 후문을 향해 필사적으로 달아나고 있었다. "막아! 도망 못가게 해!" "놓치지 마!" "죽여버려―!" 나찌스Ⅱ 한 명이 넘어졌다. 다른 한 명은 몸을 날린 추 격자에게 발목이 잡혀 나뒹굴었다. 그리고 삽시간에 사람들 한테 뒤덮여 시야에서 사라졌다. 흥분한 군중과 말리는 무 리가 뒤엉켜 큰 혼란이 일어났다. 포진하고 있던 전경이 뛰 어들었다. 폭행에 가담했던 학생들 뿐만 아니라 집회 준비 위까지 줄줄이 연행되었다. 경찰로서는 남경수 사건을 잠재 울 호재를 맞은 셈이었다. 그 나찌스Ⅱ는 무엇때문에 집회 장을 기웃거렸는가. 현우가 즐겨쓰는 수법이었다. 집에 일찍 들어가고 싶지 않아서 집중도 안되는 책을 뒤 적거리다 도서관에서 나왔을 때는 밤이 꽤 깊었다. 어둠 속 에서 검은 덩어리로만 보이는 건물들 사이로 불이 환하게 밝혀진 학생회관이 선명하게 떠올라 있었다. 버스 정류장으로 가는 길에 있는 대포집을 지나치다가 다 시 한 번 들여다보았다. 다른 손님은 하나도 없고 주인 노 파도 어딜 갔는지 보이지 않는 실내에서 강상규가 드럼통으 로 만든 상 위에 엎드려 있었다. 남경수 사건 이후로 그의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그는 집회에도 전혀 참석하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그가 얼핏 고개를 들더니 다시 상 위로 엎어졌다. 몸을 가누지도 못할 지경으로 취해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바래다 드릴까요?" "필요없어 자식아. 무슨 말이 듣고 싶어? 난 할 말 없어. 난 죽기 싫어!" 그가 돌연 발작하듯 소리치며 술상 위를 팔로 거칠게 쓸 어냈다. 병과 술잔 등속이 깨지는 소리가 텅 빈 대포집 안 을 요란하게 울렸다. "알아요. 말씀 안 하셔도 됩니다." "알어? 니가 뭘 알어? 내가 취한 것 같아? 웃기는 자식... 비켜!" 그는 일어나려다 그대로 의자와 함께 나뒹굴었다. 부축하 려는 손을 거칠게 털어버렸다. 몇 번을 넘어져 가면서 밤거 리를 위태롭게 걸어 나갔다. 전신주 아래서 컥컥거리며 술 을 다시 게워냈다. 인사불성으로 늘어진 그를 끌어다 놀이 터 벤치에 앉혔다. 근처에는 여관도 없었다. 택시를 잡으려고 일어서는데 자 는 줄 알았던 그가 중얼거렸다. "인호가 보고 싶어." 그는 울고 있었다. "망월동 어머니 묘소에 간다고 했지. 5월 16일이 제사라 구 말야. 하필이면 그 해에.... 거기서 자기 아버지가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 모두 봤겠지. 그 녀석 성격에 견딜 수 없 었을 거야." 그는 머리를 벤치 등받이에 눕힌 채 눈물이 흐르는 대로 내버려 두고 있었다. "내가 널 얼마나 미워했는지 상상도 못하겠지, 넌 겁쟁이 니까. 서지호, 가엾은 겁쟁이 새끼니까. 난 너 같은 놈쯤은 무시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최동훈이 그러더 군. 입 함부로 놀리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정말 무섭더라. 무서운 놈이야, 그 자식... 그래 죽을까봐 벌벌 떨면서 혓바 닥을 꽉 묶어놨지... 고작 그 주제꼴에 지금껏 너한테 잘난 척은 얼마나 해댔는지... 크흐흣..." 그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눈을 감고 움직이지 않았다. 거친 숨소리만이 그가 자고 있 지 않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한참만에 그가 눈을 떴다. 상체를 바로 세우며 이글거리 는 시선을 던져왔다. "경수의 죽음으로 우리 학교 극우파는 사실상 끝장났어. 아무리 빽이 좋다고 해도 학교에 계속 다니기는 그 자신이 괴롭겠지.... 하지만 경수를 죽인 건 그 놈들이 아냐." "...무슨 말인지..." 한차례 심호흡을 하고 나서 그는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 다. "내가 응급처치를 했을 때, 경수는 갈비뼈?우측 쇄골? 좌 상박골의 복합골절과 전신에 걸친 창상?열상, 그리고 과다 출혈에 의한 쇼크상태였어. 경동맥 자체에는 이상이 없었고 피부 위쪽으로 자상이 나 있었지. 입으로 피를 흘리 긴 했지만 폐손상 때문은 아니었어. 당시는 구강내 열상으 로 추정했어. 소량인데다 흑적색에 가까웠고 호흡음도 잡음 이 없었으니까.... 한마디로 한 시간 이내에 전문적인 치료 를 받는다면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상태였어." "예? 하지만 사인은... 폐파열과 경동맥 절단에 의한 과다 출혈이라고..." "그래. 그리고 병원까진 십오분여 밖에 걸리지 않았지. 즉... 병원으로 옮기는 차 안에서 누군가 수고를 한 거야. 부러진 갈비뼈가 폐를 꿰뚫도록 옆구리를 타 누르고 피부의 상처 부위에 맞춰서 경동맥을 잘라낸 거지." 수요일 두레 서클룸에서 들었던 남종석의 증언... 동훈이 는 화물칸에 경수랑 같이 있었지. 가는 도중에 정신이 들었 는지 경수가 비명을 지르더라구... 무시무시한 어떤 장면이 눈 앞을 스쳐갔다. "처음 인문관 사학과 과룸에서 술자리를 규합한 건 동훈 이었어. 얼마 안 있어서 새파랗게 질린 일학년생이 뛰어들 었고. 그런데 어떻게 그 자리에 나와, 트럭이 있는 종석이와 주먹쓰는 후배들이 딱 맞춰 있었던 것일까? 모두가 경수와 최동훈만 같이 있을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는 구성원들 아닌 가? 즉 나는 아직은 의식이 있는 부상자인 황민철을, 후배 들은 놈들을, 종석이는 운송수단을 맡았으니까 말이야.... 무 슨 뜻인지 알겠지? 최동훈은 경수를 먹이로 내주고 기다리 고 있었던 거야...." 동훈은 두레 서클룸에 있었다. 그는 우리 학교에서 살다 시피 하고 있었다. 오후의 나찌스Ⅱ 린치 건으로 거의 끌려 가고 몇 남지 않은 두레 사람들이 내일 집회 준비를 마무리 하고 있었다. "왜 그래, 어디 아프냐?" 동훈이 내 안색을 살피며 물었다. 나는 고갯짓으로 나오 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의 얼굴을 보자 목이 메어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밤이 깊어진 토요일의 교정은 학생회관을 제외하고는 전 혀 인적이 없었다. 동훈의 얼굴은 말이 아니었다. 누가 보아 도 친 혈육 같은 친구를 잃고 비통해 하는 모습이었다. 몇 차례 호흡을 가다듬은 후에야 말을 꺼낼 수 있었다. "왜...왜 그랬어. 형제와 다름없다던 친구를 왜..." 그의 순교자적인 얼굴에 의아해하는 빛이 떠올랐다. "무슨 소리야?" 삼년 전과 조금도 변하지 않은 순결한 눈빛을 보며 나는 잠시 혼란을 느꼈다. "경수를 죽인 건 바로 너야." "...뭐...?" "트럭 짐칸에 둘이 있을 때 상처 부위를 이용해서 살해했 잖아! 사실이 밝혀질까봐 상규 선배를 협박하고... 지금껏 연극하고 있었어..." "......." "그렇게까지 해서 무엇이 얻고 싶었어? 말해봐... 왜... 왜 그랬는지...속이려 들지 말고..." 그는 가만히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다 슬며시 미소 지었다. 코트 안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사진 몇 장을 꺼내 어 내게 건네 주었다. 사진 속에는 벌거벗은 두 남자가 뒤엉켜 있었다. 한 남자 의 얼굴만이 나와 있었다. 나였다.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사진들이 손아귀에서 힘없이 흘 러내렸다. 땅바닥에 펼쳐진 사진장마다 갖가지 체위를 취하 고 있는 내가 있었다. 기섭의 얼굴은 없고 철저하게 내 얼 굴만 찍혀 있었다. "내가 찍었어. 전문가 수준이지? 각도 조절하느라고 네 위를 여러 번 건너 다녔는데도 모르더라. 정말 기섭 형 약 만드는 솜씨는 알아줘야 해.... 아, 소개가 좀 늦었는데 김기 섭, 내 사촌형이야. 부탁한 지 한 달도 안 돼서 널 훌륭하게 절여 놓더군." 바닥에 떨어진 사진들을 주워서 다시 품 속에 넣으며 동 훈이 부드럽게 말했다. "냉정하게 생각해 보라구. 내가 경수를 죽였다니, 쯧쯧.... 게다가 서지호가 하는 말을 어느 누가 믿겠어. 네 꼴만 더 우스워지지, 안 그래? 그리고, 나도 물론 이까짓 사진 몇 장 때문에 네가 학교도 못 다니게 되는 건 원치 않아. 그러니 우리 서로 조심해 주자구... 좋지?" "......." "그나저나 상규 형, 뒤통수 치네. 믿을 수 없는 입은 확실 하게 닫아버릴 수 밖에"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동훈이 몸을 돌렸다. 입을 몇 번 힘겹게 달싹거린 후에야 목구멍을 맴돌던 말이 음성이 되어 흘러나왔다. "왜... 네가 이런 더러운 짓을..." "아아, 어디선가 들어본 문답 같군 그래.... 몰랐어? 승리 란 다 더러운 거야." 몇 걸음 떼놓던 그가 웃으며 돌아보았다. "참, 네가 꾀꼬리처럼 불러주던 올드 앤 와이즈 말이야. 아직도 꿈 속에서 그 노래를 듣는다구." 동훈은 절룩거리는 다리를 끌고 어둠 속으로 사라져갔다. 형을 닮았던 그가 삼년의 쓰라린 세월을 견디어 내며 무 엇으로 변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는 또 하나의 현우가 되 어 있었다. "이 늦은 밤에 무슨 바람이 불었을까? 설마 내가 보고 싶 어서 온 건 아닐 테고" 기섭이 말했다. 언제나처럼 미소짓고 있었다. "...약이 떨어졌어요." 목이 꽉 잠겨 한마디 떼는 것도 힘들었다. "벌써? 이런.... 양을 지키지 않으면 위험해." "...예" 그는 침실로 들어갔다. 잠시 후 종이봉투를 들고 돌아왔 다. "안색이 안 좋구나. 왜, 무슨 일 있는 거냐?" 그가 내 등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다정한 목소리였다. 뭐 라고 설명할 수는 없지만 지독히도 슬픈 인상 같은 것이 언 뜻 가슴 속을 훑고 지나갔다. 문을 박차고 뛰쳐나왔다. 터지 는 흐느낌을 참을 수 없어서였다. 기섭에게 눈물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최동훈 앞에서 울 수는 없었다. 동네 앞 놀이터 화장실로 들어갔다. 문을 걸어 잠그고 기 섭이 준 종이봉지를 꺼내 남김없이 입 안에 털어 넣었다. 별채의 문을 밀었다. 문은 싱거우리만치 쉽게 열렸다. 형 이 그림처럼 고요히 누워 있었다. 얼굴이 예전 그대로였다. 불에 덴 흔적조차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흔들어도 눈을 뜨 지 않았다. 한 손으로 활과 화살통을 몰아쥐고 형을 들쳐멨다. 거리 에는 아무도 없었다. 가끔씩 신문지가 바람에 날려 굴러와 서 다리를 휘감고 텅 빈 버스가 덜컹거리며 지나갔다. 복숭아 나무 밑에서 불도저는 여전히 돌아가고 있었다. 나는 시체들을 밟으며 다가갔다. 내 옷을 입고 있는 시체의 다리가 보였다. "저 왔어요. 형도요." 시체는 대답이 없었다. 다시 들여다보니 반쯤 뜯어먹힌 얼굴은 분명 그 미친 여자의 것이었다. 기차가 지나갔다. 복숭아 나무는 온데간데 없고 대신 그 자리에는 어린 시절의 빈 집이 서 있었다. 형과 미친 여자 를 나란히 방 안에 뉘였다. 나는 언제나 그 누구도 지켜주 지 못했다. 화살을 한 대 시위에 걸었다. 빈 집은 관으로 변해 있었 다. 그 안에는 아버지가 누워 있었다. 관뚜껑이 닫혔다. 시 위가 팽팽하게 당겨졌다. 화살촉에서 도깨비불 같은 파르스 름한 불똥이 튀어올랐다. 짧은 긴장이 끊어지면서 시위를 떠난 화살은 거대하게 타오르는 불덩어리가 되어 관에 깊숙 히 꽂혀 들어갔다. 처절한 비명과 몸부림이 불길 속에서 터 져 나왔다. 벌컥 세상이 핏빛으로 변했다. 하늘에서 폭풍우 처럼 핏줄기가 쏟아져 내렸다. 하늘은 말끔히 개어 있었다. 나는 쑤시는 이마를 문지르 며 일어섰다. 관은 다시 빈 집이 되어 서 있었다. 방문을 열 었다. 형과 내가 누워 있었다. 대지는 숨이 끊어진 우리에게 서 흘러나온 피로 천천히 물들어갔다. 나는 웃으며 무너져 내렸다. 나는 우리 안에 있는 아버지를 죽이는 것 이상의 일은 할 수가 없었다. 흐려지는 시선에 즐비하게 누워 있는 시체들이 보였다. 모두 낯익은 얼굴들이었다. 내 어린 시절의 친구들과 한기 욱, 반(反) 나찌스 대표들, 그리고... 동훈도 있었다. 나는 불도저 위에 누워 있었다. ...복숭아 나무.... 하늘에 대지의 핏빛이 비쳐져 있었다. 복숭아 나무는 형이었다. 엄마가 죽고 아버지를 따라 서울에 와서 형과 나는 생전 처음 외국 서커스를 구경했다. 불타는 링을 통과해 넘는 호 랑이를 보고 온 그날 밤 꿈 속에서 나는 하얀 호랑이가 되 었다. 미녀가 차갑게 웃으며 유리조각이 촘촘히 발려진 채 찍을 휘둘렀다. 링은 너무 좁았다. 하얀 호랑이는 떨면서 뒷 걸음질쳤다. 사람들은 무서운 얼굴을 하고 고함을 지르면서 하얀 호랑이를 붙들어 불타는 링 사이에 처넣었다. 꽉 죄는 불길은 머리에서 발 끝까지를 샅샅이 핥고 지나갔다. 눈알 이 타고 입 속에서 불이 솟구쳤다. 하얀 불덩이는 미쳐 날 뛰다가 하늘을 찢고 날아 올랐다. 저 멀리 아득하게 눈 덮인 겨울산장이 보인다. 나를 부르 고 있다. 그 곳은 알 수 없는 그 어느 때부터 내가 있었던 자리이고, 또한 시작이자 끝인 곳이다. 나는 다시 나의 자리 로 되돌아 간다. "디아세틸모르핀 복용과다입니다. 치사량의 두 배에 가깝 습니다. 즉사로군요." 부검이 끝난 서지호의 시체는 화장되어 5년 전인 80년 12 월 서인호가 뿌려졌던 바다 위로 흘러갔다.